다정다감한 말투로 일상 그려 뜯어볼수록 감칠맛
▲ 시 창작론 '이언인'.(국립중앙도서관 소장)
▲ 시 창작론 '이언인'.(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선생은 정조의 ‘비변문체(丕變文體)’란 그물에 걸린 희생물이었다. 선생이 남긴 산문과 시에서는 조선 후기 문학 중 주체적이고 개별적인 일상의 삶을 최대한 많이 그리려 애쓴 노력이 보인다. 선생의 글로는 친구인 김려가 교정하여 <담정총서(潭庭叢書)> 안에 수록한 산문 11권과 <예림잡패>가 전한다.


<담정총서> 안에 수록한 산문은 각각 제목을 가지고 있다. ‘문무자문초(文無子文鈔)’・‘매화외사(梅花外史)’・‘화석자문초(花石子文鈔)’・‘중흥유기(重興遊記)’・‘도화유수관소고(桃花流水館小稿)’・‘경금소부(絅錦小賦)’・‘석호별고(石湖別稿)’・‘매사첨언(梅史添言)’・‘봉성문여(鳳城文餘)’・‘묵토향초본(墨吐香草本)’・‘경금부초(絅錦賦草)’ 등이다. 이 가운데에는 전(傳) 23편을 비롯하여 문학사적인 의의를 지닌 글이 상당수 포함되었다. 


선생이 특히 산문(散文)을 많이 지었다는 데 유의할 필요가 있다. 산문은 율격과 같은 외형적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문장으로 흩어놓은 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더 의미 있는, 즉, 꽤 무거운 사상 같은 것을 담고자 하였다. 따라서 글은 형식적이고 건조하였다. 


하지만 선생의 산문은 이와 달랐다. 글은 다정다감하고 일상을 소재로 하였으며 형식에 전혀 얽매이지 않았다. ‘일상을 그려냈다’는 앞 문장은 선생의 글이 우리 주위에서 보이는 흔한 것을 양반들이나 장악하고 부귀를 위해 운용하는 고귀한 한자로 써냈다는 말이다. 


선생은 그렇게 양반들이 장악한 한자를 백성들과 공유하였다. 


우리 사회의 ‘갑질’이 유구한 전통이라면 문자(한자)는 저들에게 부역하며 숙주 역할을 했다. 지금도 부패의 재생산에 문자(영어)가 숙주인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그 시절에는 양반들의 완강한 벽에 막힌 비속한 글이었지만, 이 시절에는 선생이 그렇게 썼기에 귀한 글이 되었다. 귀한 것은 흔한 데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이 글을 쓰다 말고 주위를 둘러본다. 휴휴헌 창으로 들어오는 손바닥만 한 햇빛도, 책상도, 연필도, 의자도,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그리고 오늘이란 날도 귀하고 귀하다. 


<예림잡패>에는 ‘이언인(俚諺引)’이란 시 창작론과 <이언(俚諺)> 65수, ‘백가시화초(百家詩話抄)’가 소개되었다. ‘이언인’은 ‘3난(難)’으로 나누어 시를 창작하는 이론을 설명한다. ‘이언’ 65수는 4조(調)로 나누어 각 조에 10여 편씩 민요풍 정서를 담은 이언시이다. 이언시는 속어를 사용하여 남녀 사이 달콤한 애정 또는 시집살이의 고달픔 등을 그려낸다. ‘백가시화초’에는 시론과 시를 함께 정리하였다. 이밖에 가람본 <청구야담>에서는 ‘동상기(東廂記)’를 그가 지었다고 했다.


선생의 사상적 기반은 유교 합리주의였다. 불교의 신비체험적 원리를 철저히 부정하고 도교의 핵심인 오행(五行) 상생설(相生說) 이론에 대해서도 그 부당함을 설파했다. 선생은 본능에 충실한 글, 허위와 위선, 가식의 껍질을 벗은 현실을 쓰려 하였다. 


그러나 문체파동을 겪고 현실에서 소외되고 나서부터는 전반기에 보였던 현실주의적 세계관이 많이 사라지고 허무주의적인 의식을 보였다. 이러한 그의 인식 변화는 신비체험에 관한 글 등에서 확인된다. 종종 선생의 글 중에 별을 바라보고 걷다가 실족하는 이상향을 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선생의 글은 종로 육의전 거리 여기저기에 벌여놓은 난전(亂廛)같은 글이다. 그만큼 여기저기 요모조모 뜯어볼수록 감칠맛이 돈다. 선생이 쓴 글은 주제는 지극히 천한 분양초개(糞壤草芥)와 같은 사물을 주제로 하였지만, 그 속에서 사금파리처럼 반짝이는 뜻을 찾아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선생은 ‘백가시화초’에 시론과 시를 정리하기 전에 독서 요령을 적바림했다. 선생은 독서란 “대개 만 권 서적을 독파하여 그 정신을 취하여야 한다. 그 자질구레한 것에 어물어물해서는 안 된다. 누에는 뽕잎을 먹지만 토해 놓은 것은 실이지 뽕잎이 아니다. 벌이 꽃을 따지만 빚은 것은 꿀이지 꽃이 아니다. 독서도 이렇게 (누에나 벌이) 먹는 것과 같아야하니…”(蓋讀破萬卷取其神 非囫圇用其糟粕也 蚕食桒 而所吐者 絲非桒 蜂採花 而所釀者蜜非花也 讀書如喫飯…)라고 하였다. 글자가 아닌 그 뜻을 읽을 것을 강조한 글이다. 그래 선생은 같은 글에서 “시는 뜻을 주로 삼고 사채(辭采, 시문의 문채)는 노비를 삼아야 한다”(詩以意爲 主 辭采爲奴婢)라고 하였다. 문자에 얽매이지 말고 그 속에 담긴 뜻을 잘 새겨 볼 일이다. 


다음 회부터 선생이 자기 글을 ‘근심의 전이 행위’라고 명명한 <예림잡패>에 실린 ‘이언’을 발맘발맘 따라가 보겠다.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은 인하대학교와 서울교육대학교에서 강의하며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고전독작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