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가을 필자는 홍윤표(洪潤杓·54)화백을 비롯한 몇몇 미술인 들과 함께 중국을 여행한 바 있다. 상해 황산 소주, 항주 계림 등 중국 남방지역의 문물을 수박 겉핥기 식으로 둘러보는 여정과 함께 중국 미술인 들과의 교류와 짬짬이 스케치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안개비 속의 황산과 이강주유(離江舟遊)중에 보이는 정경들은 호기심 많은 한국 미술인 들의 화심(畵心)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별로 그림을 그릴 줄 모르는 필자는 그저 술잔이나 들고 화가들의 뒷전에서 그림이 되어가는 모습들을 보아가며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곤 했다. 어떤 화가는 잘 묘사하고 또 어떤 화가는 잘 표현하고 또 어떤 화가는 잘 변형하고 또 어떤 화가는 잘 그리고 있었다. 전문가로서 책임 있는 어구로 표현하지 못해 쑥스럽지만 홍윤표화백은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라는 것 이외 별다른 수사가 필요치 않은 것 같다. 인간들이 자연에 관심을 갖고 그려오기 시작한 이래 「잘 그린다」는 것은 지상의 목표였고 이는 아직까지도 유효한 덕목이라고 상정할 때 홍윤표화백은 일면 성공한 화가인 셈이다.

 홍윤표화백은 1945년 경기도 평택의 한 부유한 농가에서 7남매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부잣집 외아들로 궁색함 없이 자라온터라 어려서부터 태권도, 악기연주, 그리고 그림 그리기 등 현실 생활과는 다소 동떨어진 것에 괸심을 갖곤 했다. 그가 평택 중학교에 다닐 때 그를 지도한 분이 황병식화백(본보 9월 29일자 참조)이다. 이때부터 그는 화가가 되겠다는 막연한 꿈을 키우게 되었으나 그는 여전히 운동과 기타연주 등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였다.

 그의 회고에 의하면 감히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너무도 의미가 크기 때문에 포기하고 운동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어쨌든 그는 서라벌예대 서양화과에 입학하여 본격 화가 수업을 받는다. 대학 졸업후 인천의 선인학원에서 약 4년 교직생활을 하기도 했던 그는 교단의 경직된 풍토와 화가를 향한 집념을 이기지 못하고 교직을 그만 둔 후 전업작가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이미 집안이 몰락한 가운데서의 전업작가의 길은 곧바로 생활고로 연결되었다.

 아울러 이는 자신의 존재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계기가 되어 결국 홍윤표는 수많은 자화상을 그리면서 문제의 해답을 찾고자 하였다. 말하자면 그에게 있어 자화상은 그가 관조하고 있는 주변에 대한 되물음이자 해답이기도 하였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은 그의 작품 중에서도 자화상에 주목한다.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속물적 군상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에서부터 자아를 객관화시키고자 하는 덧없는 욕구, 심지어는 힘들고 험한 삶에 대한 푸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도 재미있게 전개된다. 이를테면 무거워 보이는 화구가방을 짊어지고 가는 화가의 뒷모습은 100여년전 「안녕하십니까 쿠르베씨」라는 작품을 그릴 때의 쿠르베의 의기양양함과는 너무도 큰 차이가 있어 보는 이의 가슴을 저미게 한다.

 그림을 그려야만 자신의 존재가치에 대한 합목적성이 구현되기는 하나 내일을 점칠 수 없는 현실적 문제들은 화가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홍윤표화백에게는 늘 술과 가난이라는 두가지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그러나 필자는 가난이라는 수식어에는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다. 그를 대할때마다 느끼는 점이지만 그처럼 여유로운 사람도 없는 것 같다.

넉한 시간을 갖고 작업실에서 시간을 보내며 그림을 그리고 돈 있으면 한잔 사고, 돈 없으면 한잔 얻어먹고, 흐트러진 것처럼 적당히 빈틈을 보여 사람들로 하여금 편한 마음을 갖게 하고, 알 것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여유로움 등은 그의 자연스러운 체질이자 처세술이기도 하다. 그런 홍윤표의 모습은 현재 미협 인천지회장으로서 협회를 이끌어 나가는 방식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사실 화가들은 개성이 강하고 자유분방해서 튀는 방향을 짐작하기 어려운 럭비공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삼백명이나 모인 곳이니 단체장은 삼백개의 기업체를 운영하는 셈이어서 여간 어렵고 힘들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실무자들에게 대폭 권한을 위임하고 역할을 분담시키는 팀제를 도입해 일거리를 확 줄였습니다. 그 대신 늘 순리에 맞게 솔선수범하며 작가로서의 모범을 보여주는 일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예전처럼 단체장이 모든 권한을 독점하고 행사하는 바람에 빚어지던 불협화음은 더 이상 우리 협회에서는 들리지 않게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회원들의 창작활동을 뒷바라지하는 협회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도록 애쓰고 있으니까 멀잖아 좋은 결과가 나올 것으로 보입니다.』

 말하자면 이는 「화가는 단지 그림으로 말해야」하고 그것은 미협지회장부터 솔선해야 하며 그밖의 잡다한 일들은 서로 나누어 해야한다는 현실론에 다름 아니다.

 홍윤표의 작품세계는 기법을 초월한 수채화의 세계와 현대 구상회화의 모든 기법을 참조하여 자기화 시킨 유화의 세계로 대별된다. 일단 그의 수채화는 활달한 선과 절제된 색채 그리고 이에 의해 드러난 확연한 명암대비를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 있는 구획선에 의해 드러난 대상들은 역설적이게도 추상회화와 같은 신비감을 갖게 하는데 그 이유는 종횡하는 흑색 선이 주는 파격적 구성미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의 수채화에서 선은 단순히 대상을 한정하는 기능으로서 뿐만 아니라 대상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역할까지 담당한다.

에 비하여 그의 유화는 매우 사색적이고 설명적이기까지 하다. 최근에 이르러 이러한 경향이 점점 심화되어 가는 양상을 보이는데 대부분의 화가들은 연륜이 쌓일수록 대상을 해체하여 추상화시킨다는 점을 생각할 때 홍윤표는 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셈이다.

 인천 화단과 연관한 홍윤표의 역할은 현직 인천 미협지회장으로 실추된 미술인들의 위상을 제고시키고 이합집산의 미술인들을 결집시키는 한편 현대미술 초대전, 인천시전 등을 그에 맞는 책임자에게 위임하여 전시를 둘러싼 잡음이나 전횡 등을 막는 역할을 했다는 데에 있다.

 사실 요즈음 인천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회를 보게되면 화가들이 책임감을 갖고 출품하는 면면이 뚜렷이 보이는데 이는 이 지역 화단이 바야흐로 작품을 가지고 작가를 평가하는 풍토가 조성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특히 그가 주도하여 10년째 이어져 오고 있는 「해랍전」은 인천의 가장 권위 있는 그룹전으로 참여작가의 면면이나 작품의 질이 국내 어느 단체전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전람회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가 이 지역 미술계를 이끌어 가는 화가로서 말만 앞세우는 정치꾼의 자세가 아닌 작품으로 말하는 그림꾼으로의 자세가 후배들에게 미친 영향력의 결과가 아니겠는가. 〈이경모·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