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환 논설위원

 

새해 첫날 인천의 오랜 맛집 '시정찹쌀순대' 건물에 긴 현수막이 내걸렸다. '오랜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반세기에 걸쳐 서민들의 헛헛한 마음을 달래 온 노포(老鋪)가 2018년 재야의 종소리와 함께 이별을 고한 것이다. 6일 점심 무렵 들러보니 가족끼리 찾아온 단골들이 좀 놀란 표정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었다.

▶순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북방 유목민으로부터 비롯된 음식이다. 12세기 칭기스칸 군대는 강인한 몽골 말과 독특한 전투식량 '보르츠'로 세계를 제패했다. 몽골에서는 풀이 사라지는 겨울이 되면 소를 잡는다. 살코기를 게르의 천장 등에 매달아 겨울 바람에 바싹 말린다. 이를 잘게 찢거나 빻아 소의 위나 오줌보에 터지도록 채운다. 소의 위나 오줌보는 스스로 외부 기후 변화에 적응해 내용물을 지켜준다. 몽골군은 말에 이 비상식량을 매달고 원정에 나선다. 야전에서 물을 끓여 엄지 손가락 한두 마디 정도만 풀어 넣어도 한끼 식사가 된다. 대병력으로 먼 곳에서 군량을 수송해야 하는 군대와는 기동력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보르츠는 순대의 직접 조상은 아니다. 몽골의 게데스란 음식이 더 순대에 가깝다. 돼지 창자에 채소와 쌀을 넣어 먹던 유목민들의 음식이다. 우리말 순대의 어원은 만주어 '셍지 두하'라고 한다. 만주어로 셍지는 피, 두하는 창자를 뜻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함경도, 평안도 등 추운 북방지역에서 먼저 퍼졌다. 순대가 국 음식 형태로 변화한 것도 농경·대가족제 사회에 적응한 것이다. 고기 등 재료가 귀하니 양을 늘리기 위한 진화다.

▶순대, 순댓국이야말로 간판급 서민음식이다. 6·25 때 피난생활의 허기와 추위를 달래주던 대표 음식이었다. 1960년대 이후에는 서울 구로동 일대에서 순대국밥집이 크게 성했다고 한다. 저임금의 공단 근로자들이 순대국밥에 소주를 곁들여 하루 노동의 피로를 달랬다. 산업화에도 한 몫을 한 음식이라 하겠다. 선거철이면 시장에 나타나는 정치인들이 서민 코스프레를 할 때도 순대가 빠지지 않는다.

▶인천 중구 도원동의 시정순대 간판에도 'Since 1966'이라 적혀있다. 그렇게 오랜 단골들의 성원에도 최저임금·주52시간의 비용부담은 이기지 못한 것이다. 단골 맛집이 사라지는 것은 그렇다 쳐도 졸지에 일터가 사라진 그 직원들이 더 걱정이다. SNS에 떠도는 "12월31일 해고 통보서를 든 채 새해 불꽃놀이를 지켜 보았습니다"격이 된 것이다. 책상머리 정책이 안그래도 추운 사람들의 밥그릇을 걷어차는 모습이 바로 우리 곁에 다가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