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환 논설실장

 

지난 주말 KTX를 탔다. 서울역에서 동대구역까지 1시간 40분. 신문 한 부를 채 못보고 내린다. 4시간이 걸리던 과거 새마을호는 두툼한 책 한권이 필요했다. 속도가 빠르면 에너지가 증폭된다. 빠른 만큼 안전이 더 중요한 이유다.

▶30여년 전 철도청을 처음 출입했을 때 첫 인사가 생각난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랜 조직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우정국이 갑신정변(1884년) 때 생겼으니 사실은 옛 체신부(우정사업본부 전신)가 더 오랜 조직이다.
▶1990년대 철도청은 정부의 한 기관이었다. 서울역 뒷편 철도빌딩을 상급 관청인 교통부와 철도청이 같이 쓰고 있었다. 지금처럼 외부에서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는 예가 별로 없었다. 자체 승진하거나 철도 업무를 맡았던 교통부 고위직이 철도청장이 됐다. 그래서 "7층(교통부)에서 3층(철도청장실)으로 출세하셨네"라는 인사도 받았다.
▶역사가 오랜 조직이어선지 철도청엔 낯선 풍경도 많았다. 철도청은 소도시 경북 영주에 지방철도청을 두고 있었다. 과거 중앙·경북·영동선이 지나는 영주가 대구보다 더 철도 요충지여서다. '셋만 모이면 고스톱판'이라던 시절인데도 마작(麻雀) 문화가 남아 있었다. 단신 지방근무, 밤샘대기 업무 등으로 한 세기를 이어져 왔다고 했다. 그 때 마작을 배우면서 '중국 국공내전 시절, 장제스군은 포탄이 날아와도 마작을 놓지 않았다'는 얘기를 실감하기도 했다.
▶철도청장이 되면 피하는 음식도 있었다. 보신탕이다. 철도가 운수사업인지라 청장 자리도 운수에 메였다는 생각에서다. 이렇듯 몸조심을 해도 철도청장들은 철도사고로 옷을 벗기 일쑤였다. 오랜 역사의 철도노조 역시 철도청장직엔 큰 변수였다. 청장 재임기간은 철도노조가 쥐고 있다는 얘기도 있었다. 철도 운행이 어느 정도 차질을 빚으면 정부가 어떻게 대처하는 지 등에 대한 경험이 축적돼 있다는 거였다.
▶KTX 강릉선에서는 고속철도가 탈선했지만 16명 부상으로 그쳤다. 다행히 저속 운행 구간이어서다. 그러나 사망자만 9명인 터키 고속철도 사고에 국민들은 한번 더 가슴을 쓸어내렸다. 강릉 사고가 엉뚱하게 꽂힌 선로전환기 케이블 탓이라니 더 어이가 없다. "철도 근방에 한 번 가 봤느냐"는 질문에 "철도 많이 타고 다닌다"고 답한 이가 한국 철도의 최종 책임자다.
▶이번 사고도 '남 탓'이라고 한 사장에 대해 철도노조가 사퇴를 반대했다. 후생복지에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경영에는 실패한 사장이다. 공기업 철도의 경영실패가 계속되면 국민들은 '민영화'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 철도의 안녕이 국민의 안녕인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