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민의 헌장에도 명시되어 있듯이 “구원(久遠)한 문학의 정기 감도는 여기는 내 고향 인천”이란 구절(句節)이 있다.
 그 구절에서 말해주듯 문학산은 그 자태(姿態)가 웅자(雄姿)하다.
 문학산은 서기 이전인 BC18년에 인천의 지명을 우리역사에 기록케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고주몽)의 아들 비류가 왕업(王業)창건의 큰 뜻을 품고, 인천의 구읍인 미추홀에 자리했으나 땅이 습하고 물이 짠 때문에 백성이 살 수 없게 되었다. 동생인 온조가 하남 위례성에다 도읍을 정하여 백성들이 편히 사는 모습을 보고온 비류는 자신의 부족한 능력을 깨닫고 자결한 사연이 바로 문학산이 갖고 있는 인천지명의 유래가 된다.
 비록 비류는 짧은 역사였지만 미추홀이란 인천의 뿌리는 잊을 수 없다.
 그런가 하면 현인천시청의 전신인 도호부청사가 있었던 곳이 문학초등학교 교지내였다.
 이와같이 역사의 지역이었음을 입증하여 주듯 지역발전을 위해 선정(善政)을 하거나 공적(功績)을 남긴 인사들이 많았다. 관교, 문학동이 개발되기전 농촌마을이었다.
 문학초등학교에서 관교동 비석거리로 이어지는 도로는 폭이 매우 협소하여 소달구지(牛車)정도가 통행할 수 있는 농로에 불과했다. 이제 농촌마을의 문학은 찾아볼 수 없고 6차선 도로와 구획정리 사업 등으로 소도시로 변모하면서 비석거리는 자취를 감춘지 벌써 옛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비석거리라는 지명은 다름아닌 많은 비석들이 늘어섰다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그 위치는 현 관교동 지역인 신비마을 아파트앞이 당초 비석을 세워 놓은 곳이다.
 이 지역을 다스리거나 빛을 낸 선인들이 선정을 베푼 덕을 길이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선정비 및 공덕비가 20여개로 추정되나 오랜 세월이 흘러 오면서 산사태로 쓰러지거나 홍수로 떠내려가 하천에 묻혀있었다.
 그나마 남아있는 10여개도 토사와 잡초에 묻혀 흉한 모습이었다.
 말하기 부끄럽고 죄스러운 것은 심지어 농로로 통하는 하천에 다리역할을 하는 비석도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섬뜩한 마음을 갖게 하였다.
 이때 문학, 관교동 제3대 동장으로 부임한 임관재씨가 재임(82년 9월1~84년 5월9일)할 때 이와같이 관리 소홀로 방치된 현실을 살펴보고 이를 애석(哀惜)하게 여겨 그 당시 인천시에 주재(駐在)하던 필자의 지인(知人)을 함께 만나 이와같이 사연을 소상히 설명했다. 그리고 여러곳에 흩어진 선정비를 발굴하여 인천향교앞에 모아 정비할 소요예산 지원협조를 요청하여 인천시에서 1984년 5월초에 17비석을 문학향교앞에 가지런히 세워놓게 되었는데 그 인사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대개가 부사(府使)를 역임한 분이고 조선왕조때 현감(縣監)을 역임한 분과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한 인사가 각각 한분씩이다.
 만약 전임 임 동장이 관심을 갖지 않았다면 수년이 지나 6차선 도로개설 당시 이미 묻혀있던 비석은 흔적도 없이 땅속에 묻혀 버렸을 것을 생각만 해도 정신이 아찔해진다.
 전임 임 동장이 있었기에 이 지역 후손들을 부끄럽지 않게 한 것을 문학주민의 한사람으로서 높이 평가하며 후세를 위해 비석거리의 변천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