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1920년대 인천의 생활상

▲ 1920년대 初 월미도 유원지


월미도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23년 7월 만철경성철도국이 소형 해수 풀과 해수를 데운 이른바 공동목욕탕식의 조탕을 만들고 이곳을 임해유원지로 개발한 후부터였다. 조탕을 비롯, 해방 전까지 해수욕장, 오락장, 호텔, 동·식물원, 일본식 요정 등의 시설이 구비되어 있었고 경인선에서는 `화(花)열차""를 운행하리만큼 벚꽃이 장관을 이뤘다 한다. 당시 월미도는 단연 전국 최고 명소로 이름을 날렸다. 일본 패망까지 근 20년간 전성기를 누리다 해방 후 종업원들이 시설을 인수해 운영했고 한국전쟁으로 공터가 되었다. 1891년 일본해군 저탄장과 1897년에 미국 스탠더드석유회사 석유저장소가 설치되기도 했었다.

▲ 인천전기주식회사

1906년 4월 개업했으며 송월동 2가에 있었다. 각국 거류민이 주주였는데 1912년 6월 운영난으로 한일와사(瓦斯)전기주식회사(京電 전신)에 매각되었다.

▲ 인천미두취인소(米豆取引所)

1896년 3월 재인 일본상인들이 설립하였다. 인천항은 미두의 집합지이나 그 품질과 가격의 표준을 정하기가 곤란하여 취인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 폐단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 설립 이유였다. 한국증권업협회가 1993년 발간한 증권협회 40년사는 인천미두취인소를 우리나라 증권시장의 효시라 적고 있다. 설립시기나 업무내용을 본다면 처음으로 체계를 갖춘 증권시장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은 일제가 한반도내 미곡시장 장악을 위해 멋대로 설립한 수탈기관이었다. 인천항을 통한 미곡의 대외거래와 정미업 장악을 위한 수단으로 미두취인소 설립에 애착을 보이던 일본상인들은 빈번히 일반 무역상과 외국인 상사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럼에도 일본인 미곡상 14명은 인천일본인상업회의소 지원을 받아 설립허가를 취득했다. 그것도 우리 정부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당시 인천항에 있던 일본영사관의 독단적인 결정에 의해서였다. 인천상공회의소 90년사는 이에 대해 “참으로 어이없는 노릇이었다, 남의 나라에서 그것도 주권국가기관과 하등 협의나 양해도 받지 아니하고 미두취인소와 같은 수탈기관을 자의로 허가하였다는 사실은 지나친 오만이 아닐 수 없다. …”고 적고 있다.

◀ 인천곡물협회
1908년 3월 창립했다. 재인 일본미곡상들은 대련, 여순 등에까지 지점을 두었다. 지난 1994년까지 인천일보 사옥으로 쓰이다 이후 헐렸다.

<&27831>참고자료-`간추린 인천사(인천학연구소)"" `사진으로 본 인천개항 100년(인천시)""

〈고침〉 지난 11일자 11면 `1910년 전후의 기관들-교육"" 관련 기사중 인천공립고등여학교는 현 인천여고의 전신이기에 바로잡습니다.

▲서공원과 인천각=인천각은 1905년 건립된 영국인 `제임스 존스톤""의 별장으로 당시 인천을 가리키는 상징적 건축물이었다고 전한다.

▲상설영화관이었던 표관=1909년 개관해 주로 일본영화를 상영하는 상설관으로 해방 후에는 인천시가 직영한 적이 있는데 동란중 소실되었다(신포동 소재).

▲일본계 사찰인 본원사=우리나라 사찰과는 판이한 건축양식을 볼 수 있다.

▲정토종(淨土宗) 인천교회=일제는 1910년에 소위 사찰령을 공포, 불교를 31본산으로 분할하고 각 본산은 도시포교를 실시하게 되어 사원 및 포교소가 세워졌는데 대부분이 일본계 사원이었다. 한국인 사찰은 진각사, 약사사, 인명사 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