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레·오리엔탈 등 경영돼 … '스튜어드호텔' 가치찾기 움직임
일본과 중국 등 외국 문물이 빨리 들어오던 지역이 인천이었기 때문이다.
경인철도가 놓이기 전 서울까지 가는 가장 짧은 거리도 인천을 통해야 했다.
이러면서 이 시기 인천에서 가장 호황을 누린 게 호텔업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근대 호텔이 첫 등장한 곳도 인천이었다.
인천시가 29일 표지석을 찾았다고 발표한 스튜어드호텔도 그 중 하나다.
스튜어드호텔은 중국인 주인 양기당(梁綺堂)이 한 때 미국 군함 모노카시호에서 급사로 지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당시 상호명은 이태루였다.
그는 인천화교협회 2대 회장(1919~1928)을 지냈다.
인천화교협회 소장 자료인 1913년'조선인천중화상무총회(朝鮮仁川中華商務總會)'를 보면 '이태루는 아래층은 잡화점, 위층은 호텔로 사용되었다'고 나온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쓴 '조선안내'(1891)에는 호텔 방이 3개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1933년 발간한 '인천부사'에는 객실 수가 8개였다고 적혀 있다.
어느 시점에 호텔 건물을 증·개축한 것으로 보인다.
성업하던 이곳은 경인전철 개통 뒤 경영난을 겪으면서 폐업한 것으로 추정된다.
스튜어드호텔이 원래 있던 자리는 중구 한중문화관에서 올라와 차이나타운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길목이다.
현재는 대형 중국집이 영업 중이다.
시 관계자는 "이 당시 서울에 가려면 반드시 인천에서 하루 이틀 정도를 묵어야 했다. 경인전철 개통으로 그럴 필요가 없어지면서 문을 닫은 것으로 보인다"며 "표지석의 역사 가치를 찾으려면 제자리로 옮겨야 한다는 지역 여론이 있어 이전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근대 호텔의 시초는 인천 대불호텔(1888년 건립)이다.
일본인 운영자 호리 큐타로가 덩치가 아주 크다고 해서 대불호텔이라 불렀다.
이곳 역시 호황을 누리면서 1888년 3층짜리 벽돌 건물로 새롭게 지었다. 이후 스튜어드 호텔과 같은 이유로 경영난을 겪다 1978년 7월 초순 철거됐다.
그러다 2011년 인근 상가 건물 신축과정에서 붉은 벽돌 등 매장 문화재가 나왔다.
문화재청이 원형보존하기로 결정하면서 현재 시와 중구가 26억원을 들여 복원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밖에도 인천에는 오스트리아계 헝가리인 스타인벡이 주인이던 꼬레호텔, 오리엔탈호텔, 티미나쓰호텔도 있었다.
아쉽게도 이 호텔과 관련된 역사 자료는 별로 없다.
/황신섭·송유진 기자 hss@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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