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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갑 칼럼] 고려시대 벽란도를 돌아보다
[강진갑 칼럼] 고려시대 벽란도를 돌아보다
  • 이동화
  • 승인 2015.12.25 00:05
  • 수정 2015.12.24 18: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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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대교수경기학회장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새해가 시작되고 2년이 지나면 2018년이 된다. 918년 고려 현종때 경기제가 한국 역사에 처음 등장하였으니 2018년은 경기 천년이 되면서 동시에 경기 새 천년이 시작되는 해이다. 경기 새 천년에 우리가 맞이하고 만들어야 할 미래는 어떤 사회일까. 아마도 지금보다 더욱 개방적인 사회일 것이고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개방적인 사회라는 키워드를 생각하면 고려시대가 떠오른다. 고려는 조선과 달리 바닷길이 열려 있었으며 해상을 통해 외국과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진 해양국가였다. 유교와 불교, 도교 등 다양한 문화가 꽃 피웠으며, 외국인을 등용하여 국가를 경영한 개방사회였다.

고려 광종 대 과거제를 시행하게 한 쌍기가 중국 후주 사람이다. 고려는 중국인만 아니라 아랍인과 몽골인도 국정에 참여시켰으며, 많은 외국인의 귀화를 받아들인 다문화사회였다. 또 고려청자와 팔만대장경을 만들어 낸 문화국가였다. 개경에는 화려한 저택이 많았고 여성은 물론 남성도 멋을 부리는 매력국가였다.

고려시대 경기지역에 위치한 벽란도는 고려 개방성의 상징이다. 벽란도는 개경과 가까운 예성강 하구에 자리 잡고 있는 국제항이었다. 벽란도에는 외국 선박이 즐비하게 드나들었다. 중국 송 상인은 물론이고 일본과 멀리 아라비아에서 온 상인들이 벽란도를 거쳐 개경으로 들어갔다.

송나라 상인들은 여름에 와서 6개월 정도 고려에서 머물다가 다음해 2, 3월에 돌아갔다. 5000 명 이상의 중국 송 상인들이 벽란도를 드나들었고, 1162년 한 해에 364명의 송 상인이 들어 왔을 정도로 벽란도는 번창하였고, 고려 상인들은 외국과의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

많은 외국인들이 드나든 벽란도에서는 흥미롭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일들이 펼쳐졌다. 술집과 숙박시설은 물론 전당포도 있었으며,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공연도 열렸다. 벽란도에서는 가슴 아픈 일들도 일어났다. 돈에 눈이 먼 어리석은 남편이 내기 바둑에 져서 아름다운 부인을 송나라 상인에게 빼앗긴다.

송나라 상인을 태운 배가 중국으로 가기 위해 벽란도를 벗어나 바다에 진입하였으나 여인의 한이 전달되어서인지 배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송나라 상인은 어쩔 수 없이 여인을 벽란도로 돌려보냈다는 내용의 고려 속악 '예성강곡'의 무대가 바로 벽란도이다. (이병희, '고려시기 벽란도의 해양도시적 성격' 참조)

벽란도는 외국의 고급 정보도 유통하는 도시였다. 고려 말 무기발명가인 최무선이 화약에 대한 정보를 얻은 것도 이곳이다. 중국 상인 이원이 벽란도에 도착했을 때 최무선의 노비 집에 머물렀는데, 이때 최무선은 이원을 후하게 대접하여 화약제조에 필요한 기술을 배웠다. 왜구를 물리치는데 사용된 최무선의 화약 제조는 이 같은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경기도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다 보면 고려시대보다 조선시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현재와 같은 경기도의 영역이 정해진 것이 조선시대이고, 고려시대보다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유산이 경기도에 훨씬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제 생각의 지평을 넓혀야 할 때가 되었다. 경기문화의 개방성을 논할 때 많은 이들은 조선시대 실학을 떠올리지만, 여기에 고려 문화를 더한다면 경기문화는 더욱 개방적이고 매력적인 문화가 될 것이다. 경기천년을 맞이하면서 경기인이 해야 할 일의 하나가 계승하고 배워야 할 것이 많은 고려 시대 문화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탐구할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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