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마리의 산양이 외나무 다리에서 만났다. 도시 뒷걸음질을 칠줄 모르는 산양들이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렇다고 다리가 좁아 스쳐 지나갈 수도 없다. 분명히 둘은 부딪쳐 다리 밑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니 어찌해야 할 것인가. 그러나 자연은 산양에게 한쪽은 무릎을 꿇어 엎드리고 다른 한쪽은 뛰어 넘어 건널 수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사실여부는 접어두고 이솝우화와 비슷한 이야기이다. 양보 않고 버티다 둘다 불행을 당한다는 이야기 말이다. 그러면서 사람들도 산양 처럼 다투지 않고 자신을 타고 넘어 갈 수 있도록 양보심을 발휘하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다고 마틴 루터는 어록을 남기고 있다. 채근담에도 비슷한 교훈이 있어서 “벼랑길 좁은 곳은 한걸음을 멈추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먼저 가게 하라”고 가르친다.

 노자는 “성인은 남보다 앞서기 위한 다툼을 하지 않고 항상 양보함으로써 남보다 앞선다”고 말씀했으나 양보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양보는 미덕이요 협력과 합심의 좋은 방법이다. 사회를 부드럽게 굴려주는 윤활유이다. 그렇지 않은 사회는 무질서하고 삭막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국제사회에서의 양보이다. 국제간의 양보는 오히려 부도덕이요 국가이익을 저버리는 때가 종종 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최근 우리사회는 양보를 모른다. 오로지 내 주장 대로 앞으로 나가기만 할 뿐이다. 비근한 예로 차량이 밀리는 정체구간에서도 그렇다. 차선을 바꾸려고 깜박이를 켜고 통사정 하는데도 차를 들이 민다. 소방차나 구급차가 다급하게 달려드는데도 못본척 한다. 차내의 자리양보도 시들해졌다. 아직도 자리양보는 어린 학생들이라고 하지만 양보의 번거로움 때문에 버스의 뒷자리로 달아나고 아기 엄마에게의 양보는 노인들이 한다.

 지난 폭설때의 빙판길도 사실은 양보의 외면 때문이었다. 다중이 이용하는 빌딩의 출입구는 아무도 눈을 치우려 하지 않았다. 내가 아니라도 누가 대신 하겠거니 여긴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