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보다 어려운 나라들을 여행하다 보면 담배파는 소년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작은 상자에 많지도 않은 몇갑을 들고 다니며 사라고 보챈다. 질이 떨어지는 자국 것 보다는 외국산들인데 예전 양담배로 불리며 우리눈에 익숙했던 미국 담배도 섞여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고 잠시 회고한다. 전란중이던 때 우리 소년들도 양담배를 들고 다니며 팔았다. 생업이라고는 달리 없었던 시절이라 어린 것들의 담배장사는 가계에 큰 보탬이 되었다.

 양담배는 미군진주가 끼쳐준 미군문화의 하나였다. 대개 PX를 통해 나온 부정품들이었다. 양담배라면 물론 서양담배라는 뜻이겠는데 당시의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서양은 미국 뿐이어서 미국 담배를 양담배라고 했었다. 지금도 인상이 강하게 남는 것은 아무래도 럭키 스트라이크였다. 둥글고 빨간 딱지여서 일본말 아까마루로 불리웠었다. 그외에 낙타 그림의 카멜과 윈스톤 체스터필드 팔몰 켄트 쿨 말보로가 있었는데 그 이름으로 붙인 다방도 있었다.

 그 시절 양담배를 많이 찾았던 것은 국산품이 부실하던 때였기도 하거니와 외래품이 군림하던 때 다소라도 여유있는 사람들이 겉멋으로 물었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히 망국풍조여서 단속의 대상이요 자연히 국산품 애용으로 연결되었었다. 그러니 만큼 양담배를 물고 거드름을 피우다 전매서 직원이라도 나타나면 기겁을 했었다. 양담배 단속을 둘러싼 갖가지 에피소드도 많았다. 나일론 셔츠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가 무심코 꽁초를 버렸다가 적발되고 단속반원은 담배 연기로도 양담배를 가려낸다고 했었다.

 양담배는 80년대 이후 판매자유화가 되었다. 외국산을 팔아주지 않으면 안될 만큼 우리의 무역 경제구조가 성장한 결과였다. 어디를 가든 양담배의 간판이요 그들이 시장 점유를 위해 물량적인 공세를 펴느라 우리 잎담배 농가들이 죽어나게 되었었다. 한편에서는 자유화의 틈새를 비집고 여전히 부정품이 유출되기도 했었다.

 지난6일 부평역 광장에서 담배농민 살리기 캠페인의 일환으로 외국산 담배의 화형식이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