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정신과 성공
 어느 시대든지 그 시대를 표현하거나 상징하는 시대정신이라는 것이 있다. 현대의 시대정신은 물질주의와 쾌락주의, 이기주의 등으로 압축하여 생각할 수 있다. 특히 현대의 시대정신은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다. 현대인들은 쾌락을 위하여 밤을 하얗게 밝힌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유흥업소들은 자정까지만 영업을 했다. 그런데 지금은 밤새도록 하도록 내버려둔다.

 많은 현대인들이 낮보다 밝은 밤의 문화에 눈을 게슴츠레 뜨고 찰나적 즐거움에 취해 있다. 이것이 쾌락주의이다. 청소년에게 술을 팔면 안된다. 그런데 그러면 돈을 못 번다. 돈을 벌려면 청소년에게라도 술을 팔아야 한다. 이것이 물질주의이다. 청소년에게 술을 팔아서 10대들이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그 인생이 망가지더라도 나는 돈을 벌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면 그것이 바로 이기주의다. 하나라도 남보다 더 많이 가져야 하고, 남에게 결코 뒤져서는 안되고, 내 것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남에게 양보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오늘의 시대정신이라는 것은 그래서 대단히 비윤리적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이란 대개가 자기 자신이 세상에서 얼마나 중요한 인물로 부각이 되는가에 그 초점이 모아진다. 높은 지위와 권세를 변함없이 유지하며, 다른 이들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끼치는 위치에 이르는 것, 그리고 씀씀이에 있어서도 넉넉함에 이르는 것을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성공은 자연히 남과의 경쟁에서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자신의 성공이란 다른 이의 실패의 토양에서 얻는 전리품과도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이기주의적인 성공은 그래서 파괴적일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성공에 집착하면 인간관계가 메마르게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예루살렘성에 올라갈 때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에게 은밀히 부탁을 하는 장면이 있다(마20:20~28). 여인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왕의 자리에 이를 것으로 생각하여 자기 아들들의 자리를 부탁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과 3년을 함께 다녔지만 전혀 예수님의 의도를 알지 못한 가련한 제자의 모습은 영락없는 현대인의 모습과 일치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행위의 목적이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에는 여전히 「번영신학」이 똬리를 튼 구렁이처럼 바른 신앙과 신앙의 역사를 왜곡시키고 있음은 가슴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을 믿고,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며, 선행을 실천하는 모든 신앙행위가 자기의 유익을 위해 전제되는 것이라면 신앙은 왜곡될 수밖에 없다. 상품을 팔아 이익을 남기기 위하여 소비자들에게 먼저 투자하는 장사꾼의 속과 신앙의 문제는 차원이 다르다.

 진정한 성공이란 자기중심적이어서는 안 된다. 성공은 「하나님 영광」과 「이웃의 유익」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 나의 실패가 「하나님의 영광」에 기여한다면 그것은 실패가 아니다. 비록 자신은 낮아지더라도 다른 이가 유익을 얻는다면 그것은 이미 가치 있는 일임에 분명하다. 인류 역사가 오늘에 이르도록 이어질 수 있는 것도 이런 세계관을 가진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모아지는 곳이 아닌 곳, 남들이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알아주지도 않는 곳에서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헐벗고 춥고 배고픈 이들의 유익을 위하여 희생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적인 면에서 어떤 보상이 주어지지 않더라도 그 삶 자체를 포기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 삶이 사람들의 칭송을 받게되더라도 그 때문에 교만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