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하대 하와이역사문화탐방
사라져가는 독립운동 흔적을 찾아서 (2)
   
▲ 하와이 오하우섬 한인교회에 있는 이승만 건국대통령 동상. 인하대총동창회 하와이역사문화탐방단이 사실상 인하대 설립자인 이승만 동상 앞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다.


이승만 1913년 하와이에 정착

한인기숙학교 교장 취임 이후

중앙학교 변경·여성교육 활기

1925년 올라아에 동지촌 조성

동포들 불러모아 숯가마 운영

인하대동창회 터 보존 움직임



미국 하와이에 우리 교민들이 안착한 지 110년, 이승만 건국대통령이 항일독립운동을 위해 하와이로 건너간 지도 한 세기 전의 일이 됐다.

미주독립운동의 중심지였던 하와이는 열대의 풍광에 낭만이 넘치는 세계 최고의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하와이에는 우리 선조들의 아픔과 그리고 조국을 되찾겠다던 기개가 서려 있지만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현지 독립운동유적지들은 고국의 무관심 속에 하나둘씩 자취를 감춰 가고 있다.

다행히 빅 아일랜드 숯가마터는 최근 5차례 역사탐방을 진행한 인하대총동창회를 중심으로 매입움직임이 일고 있으며 현지 교민들도 유적지 보존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 인하대총동창회 2012년 하와이역사문화탐방단 당시 이승만 건국대통령 관련 자료를 기증한 빅 아일랜드 힐로기독교회 관계자에게 이응칠 인하대총동창회장이 기념품을 전달하고 있다.



▲오하우섬 일대 유적지에는 기념비도 없어

1913년 하와이에 도착한 이승만이 처음 정착한 곳은 교민들이 마련해 준 푸누이(Puunui) 거리의 한 가옥이었다.

현지 언론에서 박사모를 쓴 이승만의 사진과 함께 그를 한국의 위대한 지도자로 소개할 정도로 미국인에서도 주목을 받았던 그가 살았던 푸누이 가옥은 현재도 남아 있다.

높지 않은 담 사이로 조그만 차고가 보이는 전형적인 미국의 2층 주택, 주변의 개인주택과 별 다른 차이가 없던 평범한 그곳에서 그는 '한국교회핍박'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일본의 105인 사건 날조에 대해 기록한 이책은 1913년 4월 신한국보사를 통해 발행돼 일본의 한국 기독표 핍박 이유와 기독교의 혁명사상 등 이승만의 기독교 세계관을 담아냈다.

이승만의 첫 가옥 건너편에는 한인중앙학교 여학생 기숙사터가 보인다.

1914년 하와이의 8개 섬들을 돌며 순회집회를 열던 이승만이 동포 소녀 중 상당수가 학교에 가지 못하거나 중국인 또는 하와이 본토인에게 시집을 가는 경우가 빈번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국어까지 잊은 소녀를 보며 이승만은 그들에게 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 즈음 한인기숙학교 교장으로 취임한 그는 교명을 한인중앙학교로 변경했다.

이승만이 교장으로 취임했다는 소식에 교민들은 앞다퉈 자녀를 학교로 보냈다.

여학생이 입학하기 시작하면서 이승만은 학교를 남녀공학제로 바꾸고 학교 주변에 집 한 채를 월세로 구해 여학생 학교를 신설한 뒤 기숙사를 만들게 된 것이다.

1922년 11월 이승만이 설립한 한인기독교회의 예배당이 완공됐다.

노스 스쿨(N. School) 거리에 위치했던 교회터는 현재 흔적도 찾기 어렵다.

한인기독교회는 1928년 건물을 매각한 뒤 10년 동안 신흥국어학교를 예배당으로 사용하게 된다.

이승만은 1935년 한인기독교회 건축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위원회를 조직하고 미국인 재력가들이 거금의 기부금을 내놓으면서 릴리하(Liliha) 거리의 6000㎡ 부지를 구입하게 된다.

1937년 10월3일 개천절에 맞춰 착공한 교회는 서울 광화문의 외형을 모델로 설계됐다.

설계자는 한인중앙학원의 첫 졸업생이자 한국인 최초의 건축사인 김찬재였다.

공사중 추가로 기부금이 들어왔고 1938년 4월24일 1500여명의 인파가 모인 가운데 헌당식이 거행됐다.

대통령직에 하야한 후 하와이로 돌아온 이승만 부부는 이 교회를 찾곤 했다.

1965년 7월21일 이곳에 700여명의 교인과 조문객이 참석한 장례예배의 주인공은 바로 그였다.

릴리하의 한인기독교회는 현재까지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광화문 누각은 2000년 재건축에 착공해 2006년 완공됐다.

교회 옆 마당엔 이승만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동상 아래엔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한인기독교회 창설하신 어른 우남 리승만 박사상'이라는 문구와 함께 그의 좌우명이 새겨져 있다.

이 동상은 1985년 광복 40주년을 맞아 하와이 교민들이 성금을 모아 건립했다.

 

   
▲ 빅 아일랜드에 위치해 있던 동지촌에 위치한 이승만 대통령 거주지. 현재 유럽계 하와이 현지 주민이 살고 있어 방문할 때마다 허락을 받아야 한다.


▲인하대총동창회 중심으로 빅 아일랜드 숯가마터 매입 나서

1925년 3월 이승만은 자본금 7만달러의 동지식산회사를 설립하고 하와이섬 올라아(Olaa) 지방에 임야 3.86㎢(117만평)를 매입한다.

동지촌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개간사업을 시작했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노령의 한인동포들을 불러모아 농사를 함께 지으며 살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이승만은 동지촌의 성공을 위해 모든 여력을 쏟아 부었다.

근대적 숯가마를 설치하기 위해 3개월의 걸친 노력 끝에 과학적 새 방법의 숯가마를 설치해 하루 4t 매달 2000포대의 숯를 만들 수 있었다.

90년이 지난 현재 이 숯가마터는 비교적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크기는 대략 가로 세로 2m 입구에 20m 길이였고 사각터널식이었다.

아래쪽에 땅을 파 가로 세로 1m가 안되는 연통을 설치하고 위에 레일을 갈아 숯을 만들어 냈다.

그렇지만 한 세기 가까이 흘러버린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붕괴직전에 놓였다.

사유지인데다 입구 초입이 밀림처럼 수풀이 우거져 외부인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것이 그나마 외형이라도 보존할 수 있었던 비결이라면 비결이었다.
 

   
▲ 2013년도의 숯가마터. 2011년에 비해 상당히 훼손돼 있다.


숯가마터 인근 마을엔 이승만의 동지촌 거주지가 자리잡고 있다.

이승만이 거주하던 주택도 외형은 유지하고 있었다.

사유지인 만큼 탐방 때마다 운이 좋으면 외형이라도 둘러 볼 수 있었다.

현재 숯가마터는 모두 4필지로 나뉘어져 현지인 소유로 돼 있다.

이 숯가마터를 인하대총동창회를 중심으로 매입에 나서 독립운동유적지로 기념하겠다는 움직임이 조심스럽게 일고 있다.

5번의 역사탐방을 통해 더 이상 숯가마터를 방치해서는 안되겠다는 결정에서다.

그렇지만 움직임은 신중하다.

지난 2004년 현지 한인들이 돈을 모아 숯가마터를 매입하려 했지만 토지주들의 이견으로 매입에 실패한 경험이 있어서다.

이응칠 인하대총동창회장은 "정부에서 나서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며 "더 이상 늦춰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탐방단에 나섰던 분들을 중심으로 의견을 모으고 있다. 인하대총동창회에 우남장학회가 있는 만큼 그분들께도 의견을 들어 매입에 나설 계획이다"고 밝혔다.
 

   
▲ 1913년 이승만 건국대통령이 하와이에 이주한 뒤 생활했던 초기 가옥 건너편에 위치했던 한인여성회 사옥. 현재 사유지로 일반인의 접근이 허용되지 않고 있다.


숯가마터가 있는 빅 아일랜드 알라이 공동묘지는 가족이 없는 한국인 이민자들의 묘지가 조성된 이역만리 타국에 의지할 가족없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하루하루 보낸 이민자들의 아픔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주변의 일본, 중국 이민자들의 묘역에 비해 관리가 허술한 한국이민자들의 묘지, 오랜 세월 비바람에 지워져 알 수 없는 이름들을 남아있다.


/하와이=글·사진 김칭우기자 chingw@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