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하대 하와이 이민역사문화탐방
사라져가는 독립운동 흔적을 찾아서 (1)
   
▲ 이승만 건국대통령이 하야 후 하와이에서 마지막 삶의 불꽃을 불태웠던 가옥. 현재 사유지로 일반인의 접근이 허용되지 않고 있다.


이승만 유적 중심 일제강점기 이민 현대사 간직

동포들 설움 견디며 숯공장 세워 조국해방 지원

유적 대부분 사유지…기념관 조성 등 보존 절실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 독립자금의 3분의 2를 담당하던 애국애족의 성지 미국 하와이.

망국의 목전에 선 조국에 등 떠밀려 강제이주나 다름없는 하와이로의 이민생활, 노예나 다름없는 사탕수수 노역과 인종차별, 나라없는 설움을 견뎌내며 그들이 학수고대했던 것은 조국의 광복이었을 것이다.

이역만리 조국을 떠나온 이민1세대들이 하와이에 발을 내딛은지도 벌써 110년, 하와이에서 독립운동 흔적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 이응칠 인하대 총동창회장이 빅아일랜드 숯가마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숯가마터는 언제 붕괴될 지 모르는 상태로 방치돼 있다.


인하대총동창회 하와이역사문화탐방단은 한인 이주 110주년을 맞는 2013년 다시 하와이를 찾았다. 올해로 5회째를 맞는 역사탐방이다.

10월이지만 작렬하는 태평양의 태양빛은 강력했다.

4박6일간의 일정으로 진행된 역사탐방은 인하대 창학의 모태가 된 하와이 이주민들의 생활터전이자 독립운동 유적지에 초점이 맞춰졌다. 중심은 인하대의 사실상의 설립자이자 하와이 독립운동의 상징, 이승만 건국대통령 관련 유적지였다.

하와이에서 가장 큰 섬이자 하와이라는 이름을 있게 한 빅아일랜드섬 탐방은 비행기를 타고 1시간여를 가야 하는 여정이지만 굴곡진 한국 현대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들려야 하는 곳이다.

1913년 2월 하와이에 도착한 이승만은 하와이를 주거지로 미 본토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벌인다.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같은 해 한성(서울)에서 선포한 임시정부 집정관 총재로 추대된 그는 그 해 9월 상하이와 한성의 임시정부를 통합한 통합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이후 미국에서 임정 대통령직을 수행하던 이승만은 이듬해 상하이로 갔다가 6개월 만에 미국으로 되돌아온다. 이 때 '동지회'를 결성한다. 하와이 교포들이 부담해야 하는 임정자금 마련과 연로한 1세대를 위한 생활공동체 형태를 만들겠다는 계획이었다.

   
▲ 하와이 빅아일랜드 힐로 근처의 공동묘지에서 한인 이주민을 기리는 위령비가 서 있다. 성공회 수녀가 이주민들의 명복을 빌고 있다.

이승만은 그러나 동지회를 세우는 과정에서 노선 문제로 하와이 내 독립운동가들과 마찰을 빚었고, 설상가상으로 1925년 3월 상하이에 있던 임정 의정원에 의해 대통령직을 탄핵당한다.

이에 대한 돌파구로 이승만은 독립운동 자금마련을 위한 '동지식산주식회사'를 설립한다.

이 회사를 통해 1926년 3월까지 3만 달러를 모금한 뒤 1만달러로 힐로 남쪽 18마일 떨어진 올라아 지역에 930에이커에 이르는 나무 임야를 매입한다. 동지식산주식회사는 1929년 6월 진주만에 있는 미 해군당국에 7만 피트의 선박건조용 목재를 납품한다.

그러나 불량품으로 퇴짜를 맞자 이를 활용하기 위해 숯을 생산하기로 결정한다. 24시간동안 4t의 숯을 구울 수 있는 용량의 숯가마가 완성됐고 매달 2000봉 씩의 군용폭발물 제조에 사용할 숯이 제조됐다. 그렇게 만들어진 5000t의 숯이 포틀랜드 마샬회사에 납품돼 검사를 받았지만 품질미달이란 판정을 받는다.

이와 관련 하와이대 한국학센터 이덕희 연구원은 "숯은 오히아 나무 벌목의 부산물인데, 숯제조라는 것이 아주 흥미로운 사업이라고 이승만은 기술했다"며 "그는 여러 숯제조업자들이 하와이 군도에 산재했지만 이들의 제조방법이 낙후해 지역시장의 수요에 응할 정도의 양조차 생산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

역사탐방단이 2009년에 이어 2년 만에 다시 찾은 숯가마터는 사유지인 탓에 간신히 허락을 받고 사람 키를 훌쩍 넘는 정글같은 풀숲을 헤치고 무수한 나무가지를 치우고 들어가야 만날 수 있었다. 2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만큼 2009년 방문했을 때 보다 훼손 정도가 심했다.

숯을 실어 담았을 쇠 구조물은 발길 닿는대로 부서지기 일보 직전이었고 완성된 숯을 날랐을 레인은 철구조물이지만 생명을 다한 듯 했다. 숯을 실제 구었을 20여m의 철로 된 숯가마는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숭숭 구멍을 뚫린 상태였다. 터널을 받히는 10cm 두께의 철 천장은 낙엽잎이 겹겹히 쌓이면서 배불뚝이처럼 아래로 큰 원형을 만들어 냈다. 손이라도 대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숯가마터를 보며 탄식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다.

역사탐방단을 이끌고 이 곳을 찾은 이응칠 인하대총동창회장은 "참담함을 넘어 분노가 치민다"며 "이곳이 어떤 곳인데 여전히 이렇게 방치돼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동창회 차원에서라도 대책을 세워야 겠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동창회 차원에서 대책을 논의할 문제는 아닌 듯 하다.

세월이 흘러 하와이가 사탕수수 중심의 농업산업에서 국제적인 관광중심산업으로 탈바꿈되면서 빅아일랜드에 살던 동양계 이주민들 대부분이 와이키키가 있는 오하우섬으로 옮겨 갔다.

숯가마터가 있는 알라아지역 역시 몇몇 나이든 이들만이 외로이 집들을 지키고 있는 상태다.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독립유적지로 보전이 가능하다는 것이 탐방단원들의 판단이다.

특히 숯가마터 주변에는 동지회의 이민 1세대가 살았던 가옥과 이승만이 거주했던 가옥과 그가 심었다는 금송 또한 여전하다.

이 회장은 "노예같은 삶을 살면서도 조국과 자식들 교육, 생활비를 위한 깡통 3개를 머리맡에 놓았던 동포들에게 이제는 발전된 조국의 위상을 보여 줘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며 "이제라도 숯가마터를 비롯한 하와이 곳곳에 산재된 독립유적지를 정부차원에서 보존하고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탐방단원들을 더욱 숙연하게 한 것은 빅아일랜드의 공동묘지에서였다.

방치된 숯가마터를 둘러본 뒤 마음이 무거워진 탐방단은 빅아일랜드 최대 도시 힐로 인근의 공동묘지에 들러 한국 이주민 위령탑에 참배했다.

주로 한국인과 일본인, 중국인들의 묘로 구성된 공동묘지에는 광복을 보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한 이민 1, 2세대들이 주를 이뤘다. 그중 결혼을 하지 못해 일가를 남기지 못한 이들도 많았다.

깨끗하게 정비된 일본인, 중국인 묘와는 달리 연고자가 없는 한국인 묘는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가 많았다.
와이키키가 있어 한인회와 한국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오하우섬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1913년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에 이주한 뒤 생활했던 초기 가옥이나 독립자금 마련과 동포의 단결을 위해 구성된 한인여성회 사옥, 하야 후 하와이 생활 말년을 보냈던 가옥역시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여창동 하와이 한인관광협회 고문은 "간혹 한국에서 오신 분들이 이승만 건국대통령 관련 유적지를 보고 싶다고 해도 대부분 사유지여서 제대로 안내를 해주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더 이상 외관이 변형되기 전에 매입해 독립운동기념관을 조성하는 등 고국의 관심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하와이=글·사진 김칭우기자 chingw@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