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8.11.18 제나라 수도 임치

 제나라 고도 임치의 아침이 밝아온다. 호텔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내의 첫 인상은 개발이 시작되는 신흥도시 같다. 호텔에서 나와 시내와 노천시장을 걸어보니 어제와는 달리 몹시 춥다. 거리에는 새벽이라 자전거로 출근하는 사람이 많고 차는 한가한 촌처럼 드문드문하다. 서울 날씨는 얼음이 얼고 첫눈이 내렸다고 한다.

 오늘은 학생들이 수능시험 보는 날이라 유독 한국에서만 있는 입시 추위가 이곳 중국까지 불어닥친 모양이다. 한국에는 장차 큰 인물이 많이 나오리라. 대학에 접근하는 날부터 이렇게 많은 시련을 젊은이들에게 하늘이 준다는 것은 우리나라 꿈나무들에게 기대를 건다는 징후라 생각한다.  태공망(太公望)이라고도 부르고 여상(呂尙), 또는 우리나라에서는 강태공이라고 부르는 이의 무덤을 찾아 길을 재촉했다. 무덤은 시내에 있는데 강태공사(姜太公祠)의 주차장은 넓다. 건물 바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초라한 석방이 나오는데 전서(篆書)체로 조제사주(祖齊師周)라고 음각 되어 있다. 제나라를 세운 사람이고 주나라에 대해서는 스승이 된다는 대단한 긍지가 있는 글이다. 주나라를 반석 위에 세운 왕은 무왕(武王)인데 그는 강태공을 사상보(師尙父)라고 불렀다. 스승으로 받들어 모시고 아버지처럼 따랐다고 풀 수 있는데 그렇다면 조제사주는 과장된 말은 아니다. 주나라 왕실보다 위에 있는 사람이 강태공이 된다, 석방을 지나 건물 뒤로 사람이 다니는 통행로 바로 앞에는 별로 정성들이지 않은 것 같은 비석이 하나 초라하게 서 있다. 「무성왕강태공묘(武成王姜太公墓)」라고 쓰여 있을 뿐 비문도 없다. 비석 뒤에는 다듬어져 있지 않은 큰 동산이 있는데 이것이 묘라고 한다. 산 위에는 나무와 잡초가 헝클어져 있고 한쪽은 흙이 무너져 내려와 흉하게 보인다. 『사기』 「세가(世家)」에 보면 강태공은 100여세에 죽었다고 되어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나가자 아들 정공(丁公)이 무리 없이 세습하여 왕이 되었으므로 당시의 강태공의 무덤은 동산 만한 크기의 묘가 가능했으며 더욱이 당시 바다를 이용하여 염전을 일구어 경제가 풍부했던 제나라는 석물 등 모든 것을 갖추고 화려하게 조성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묘는 많은 세월이 흘러서 그런지 정돈도 안되어 있고 품위도 없으며 초겨울에 묻혀 스산하고 찾는 이 조차 보이지 않는다.

 『사기』 「세가(世家)」에 보면 강태공은 성(姓)이 강(姜)씨지만 조상이 하(夏)와 상(商)왕조시에 여(呂)지방을 봉지로 받은 적이 있기 때문에 여상(呂尙)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강태공은 성이 둘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동해(東海) 근처 사람이라고만 되어 있으나 우리가 오늘 여행하는 치박시(淄博市) 임치구(臨淄區)에 해당된다고 하는 것이 정설이다. 강태공 하면 낚시를 연상하듯 70여세까지 위수에서 곧은 낚시로 고기를 낚았다는 이야기는 물고기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세월을 기다렸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나중에 문왕(文王)으로 추서되는 서백(西伯)이 사냥을 나가려고 점을 치니 점괘에 나오기를 『잡은 것이 용도, 이무기도 아니고 호랑이도, 곰도 아니다. 잡을 것은 패왕의 보필이다』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서백이 사냥을 나갔다가 과연 위수 북쪽에서 여상을 만났는데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는 크게 기뻐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선대인 아버님 태공(계력, 季歷) 때부터 이르기를 「장차 성인이 주나라에 올 것이며 주나라는 그로 하여 일어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선생이 진정 그분이 아니십니까? 우리 태공께서는 선생을 기다린 지 오래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그를 태공이 기다렸다는 뜻으로 태공망(太公望)이라 부르고 수레에 함께 타고 성으로 돌아와 스승으로 삼았다고 기록으로 남아있다. 서백도 은나라 폭군 주왕에게 감금되어 생명을 위협받기도 한 사람이어서 시의를 찾기 위해서 세월을 낚시로 대신했을 지도 모른다. 이러한 때에 우연히 또는 누구의 소개로 만난 여상과 계력은 대화를 하는 중에 서로 사람을 알아보고 의기 투합한 것은 아닐까?

 또 『사기』에는 다른 말도 있다. 강태공이 박식하여 은나라 주왕(紂王)을 섬겼으나 주왕이 포악무도하여 그 곁을 떠나버렸으며 그 부당성을 제후들에게 유세하였지만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였다가 마침내 서백을 만나게 된 것이라고 한다. 또 이런 이야기도 전한다. 여상이 바닷가에서 은거하던 중 서백이 유리(횯里)에 구금되자 평소에 뜻을 같이 하던 산의생(散宜生)과 굉요(쥺夭)에게 『내가 듣기에 서백은 현명하고 또 어른을 잘 모신다고 하니 어찌 그에게 가지 않겠는가?』라고 말하고 이들 세 사람은 서백을 위하여 미녀와 보물을 구해서 폭군 주왕에게 서백의 몸값으로 바쳤다. 이리하여 서백은 옥에서 풀려나 주나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굴원(屈原)의 초사(楚辭) 「천문(天門)」 편에 보면

  師望在肆(사망재사)
 昌何識(창하식)
 鼓刀揚聲(고도양성)
 后何喜(후하희)   강태공이 저자 거리에 있을 때

 문왕이 어떻게 그를 알았던가?

 그의 칼 소리를 듣고

 문왕이 기뻐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문왕, 무왕 2대에 걸쳐 스승(師)의 자리에 오른 태공망이 푸줏간에서 일하는 것을 문왕은 어떻게 알았을까? 도(刀)를 고(鼓)한다는 것은 옛날 큰칼의 자루에는 방울이 달려 있기 때문에 그것을 치켜들면 소리가 나는 것을 말한다.

 칼을 두드리면서 일하는 여상에게 문왕이 친히 가까이 가서 까닭을 묻자 대답하기를 『하등의 도살자는 소를 잡고, 상등의 도살자는 나라를 잡는다』고 했다. 이에 문왕은 기뻐하며 여상을 수레에 태워 같이 돌아왔다고 한다. 신분은 낮지만 유능한 인물이 주군 될 사람과 느긋하게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은 퍽 역동적인 장면이다. 아마도 당시 서백의 처지가 불우했을 지도 모른다. 낚시하는 방법이나 생선요리 또는 사냥하는 방법이나 잡은 고기의 맛 등을 취미로 서로 담소한다는 것은 사람을 알아보고 격을 없애는 순간일 수 있다. 여상의 빈곤을 이르는 말로는 부인에게 쫓겨나고 또는 부인이 살 수 없어 도망간 것이나 둘 다 어느 것이 진실이든 궁핍한 생활을 상징한다. 곧은 낚시라는 것도 생산적인 말은 아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 가난에 찌든 생활과 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서백을 만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은 운이 하늘에 통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출중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강태공 무덤에서 되돌아 나오다 보면 왼쪽으로 강태공사(姜太公祠)가 있다. 명성에 비해서 못 미친 건물이며 중국 건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웅대함이나 예술성을 찾아볼 수 없다. 안에는 강태공을 중심으로 바른 쪽에는 정공(丁公)이 왼쪽에는 환공(桓公)의 조상(造像)이 있다. 사당에 세 분만을 모신 이유는 무엇일까? 정공은 강태공의 대를 이어 제후에 오를 사람이고, 환공은 나라가 사분오열의 위기에 처했을 때 일어나 영민한 재상인 관중과 안영 같은 사람을 등용하여 전국칠웅 중 제일 먼저 패권(覇權)을 장악해 제나라의 위상을 천하에 알렸기 때문일까? 여기서 이것저것 살펴보다가 옆에 있는 구조전(丘祖殿)을 찾아 들어갔다. 구씨 문중의 조상이라니 안에는 목공(穆公)의 상이 있고 그 앞 양쪽에는 다듬어진 돌 위에 「世界丘氏大始祖丘穆公追慕碑, 1997. 10. 1. 대한민국 평해(平海) 구씨 대종친회」라고 음각되어 있고, 반대쪽에는 한글로 『세계구씨대시조구목공추모비』라고 되어 있어 같은 내용이 한글과 한문으로 되어 있는 것은 한국 구씨의 자주성을 강조한 것인지? 목공이 누구인지, 강태공의 후손이 언제부터 구씨로 변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더구나 놀란 것은 옆방에는 중국의 507개 성 중 45개 성이 강씨 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되어있는데 45개 성이 나무로 된 문패들로 벽 사방에 차례로 걸려 있다. 처음에는 강(姜)씨의 문패가 크게 걸려있고, 다음으로 呂(丘, 邱), 許, 謝, 丁, 桓, 盧, 章, 賀, 齊, 紀, 强, 駱, 高, 柯, 焦, 左, 崔, 井, 富, 谷, 申, 文 등이 질서정연하게 놓여있어 사람의 눈길을 끈다. 『중국구씨사기(中國丘氏史記)』에 보면 강태공의 후손들이 분파해 여러 성으로 나누어졌는데 그 중 구(丘)씨는 산동성 창낙현(昌樂縣)에 위치한 영구(營丘)라는 곳에 정착했으므로 영구의 구를 성으로 삼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렇듯 고대 중국에서 시작한 구씨는 중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에 산재해 있다. 중국 구씨 중에는 구(丘)자가 아닌 구(邱)를 성자로 사용하고 있다. 그 이유는 중국의 성현 공자의 이름이 「구(丘)」였기 때문에 청나라에서 성현의 이름을 성자로 삼는 것은 불경스럽다 하여 구(丘) 대신 구(邱)를 성으로 사용하도록 명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청나라가 망한 뒤에는 다시 구(丘)로 복성했다고 한다. 당나라 고종 3년에 구대림(丘大林) 장군이 일본에 사신으로 가다가 중도에 풍랑을 만나 경북 울진군 평해에 표류된 것이 평해 구씨가 한국에 생겨난 시초라고 기록되어 있다. 제국역사박물관은 사람과 물건으로 입추의 여지가 없고 끝이 안 보이는 넓은 노천시장 안에 있기 때문에 들어가기가 퍽 힘들다. 물품을 진열한 좌판과 장사꾼들이 통로를 점령한 형편이라 오가는 차량은 서서 틈이 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죽은 쥐를 죽 매달아 전시하면서 쥐약을 광고하는 사람들, 철지난 옷들을 걸어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사람들, 음식을 파는 사람, 먹는 사람, 야채를 실은 마차를 끌면서 길을 내달라고 소리치는 사람부터 노천에서 머리를 깎는 이발사까지 싸구려 물건과 가난에 찌든 사람들이 한 데 섞여 되어 온 시장이 들끓듯 하지만 무질서하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생명력이 넘치는 활력이 있어 보인다. 중국의 저력을 보는 듯 했다.

 겉으로 봐서는 박물관이라기보다 중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공서 건물을 빌려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안에는 전국칠웅의 위치도, 전쟁실전도 등 옛 것을 재현하는데 많은 노력을 들인 것이 엿보이지만 이상하게 전시물은 보이지 않았다. 전시장도 좁고 조명이 어둡고 침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