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구 주안동 동양장 사거리-제물포여중의 뒤편 언덕은 예전 공동묘지가 있었던 곳이다. 시민회관에서 문학산에 이르는 일대가 모두 묘지였다. 인천시사에 의하면 선인체육관 자리의 숙골 묘지가 협소해지자 새로 물색된 곳이라고 한다. 1916년의 일로 당시 부천군 문학면 승기리여서 승기리 묘지라고 했다. 신비묘지라고도 해서 지금도 더러 그 일대를 신비마을이라고 부르는 고로들이 있다.

 그리고 이곳 승기리를 가르는 골에 승기천이 흘렀다. 언뜻 생각에 큰 하천을 떠올릴지 모르나 그저 작은 시내일 뿐 지금의 독쟁이고개에서 발원 인근의 작은 개천들을 모아 남동쪽으로 흐르다 호구포대 곁에서 바다로 흘러 들었다. 지금은 하루종일 각종 차량들로 붐비는 곳이 되었지만 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독쟁이와 승기천변은 공기 맑고 한적한 교외였다. 목장이 있고 과수원이 있었다. 맑은 시내가 흘러 여름이면 어린것들이 헌 소쿠리로 수초 밑을 훑어 붕어도 미꾸라지도 잡고 겨울에는 스케이트를 즐겼었다.

 이곳엔 아득한 옛날부터-그때는 바닷물까지 밀었다던가-사람들이 살았던듯 하다. 이곳 언저리에 고인돌이 산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인하대 후문에서 시작하는 인하로 연변을 『사미』라고 했는데 대표적인 고인돌이 그곳에 있었다. 이름하여 주안지석묘이며 시가지가 확산되면서 1979년 부득이 수봉공원으로 옮겼었다.

 그러나 지금 그곳에서 승기천은 눈을 비비고 찾아 보아도 눈에 띄지 않는다. 이미 오래 전 땅 밑으로 숨어 도심의 폐수가 고이는 하수구였다가 그마저 80년대 복개하여 왕복 8차선의 만수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느라 승기천은 구로동 버스터미널을 지나서야 숨바꼭질을 끝내듯 지상으로 나온다. 그러니 지금 시민중 승기천을 기억하는 이들도 드물 것이다.

 그런때에 승기천변의 생태계 교란이 심각하다는 보도가 나왔다. 귀화식물의 왕성한 번식으로 고유의 먹이사슬이 파괴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승기천 회복을 위한 심포지엄』에서 그같은 주장이 나왔다고 한다. 사라져 가는 승기천을 지키려는 모임이 눈물겹도록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