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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상화된 예술혼" … 종교상징 개연성 적어
"형상화된 예술혼" … 종교상징 개연성 적어
  • 승인 2009.12.10 00:00
  • 수정 2009.12.09 19: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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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자 다산이 가톨릭 신자여서…" 오해 근원

기초설계뒤 자리떠나 본격 축성땐 참여 못해



10년 전부터 수원지역에 떠도는 '풍문' 내지 '논란'이 있었다. 방화수류정에 관한 이야기다. 바람결에 떠도는 이 말은 아직까지 의심할 바 없는 정설로까지 여겨지고 있기도 하다. 얘기인즉슨, 다음과 같다.
방화수류정 왼쪽벽엔 '십자문양'이 수놓아져 있다. 검붉은 벽돌 한 가운데 규칙적으로 박힌 이 십자가는 벽돌로 모양을 낸 것이 아닌 통돌을 깍아놓은 모습이다. 논쟁의 핵심은 이 십자문양이 과연 '천주교의 십자가를 상징하는 것인가, 아니면 단순히 미학차원에서 새겨넣은 것인가'였다.
수년 전, 어느 날이었다. 천주교 수원교구장을 지낸 최덕기(바오로) 주교가 김준혁(수원화성박물관 학예팀장) 박사에게 물었다. 신도들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였다.
"저 십자가 문양이 천주교의 상징이라는 말이 사실인가요? 만약 그렇다면 내가 로마교황청과 협의해 방화수류정을 중요한 천주교성지로 만들겠습니다."
바오로 주교의 말은 방화수류정을 로마 바티칸이나 예루살렘에 버금가는 세계적인 성지로 세우겠다는 뜻이었다. 그 얘기를 들은 김 박사는 잠시 말문을 닫았다. 그는 이내 단호하고도 잔인(?)하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선조들의 예술혼이 깃든 아름다운 문양일 뿐입니다."
김 박사 역시 방화수류정이 세계적인 성지가 된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역사적 진실은 그런 것이 아닌 것이다.
방화수류정의 십자문양이 천주교상징으로 오해되는 이유는 화성을 설계했던 다산 정약용이 천주교신자였기 때문이다. 다산 집안이 우리 나라에 천주교를 처음 전파시킨 집안이라는 사실은 이런 오해를 더욱 증폭시킨다.
다산은 정조대왕이 총애하는 신하였고, 토목·건축학에 뛰어난 능력을 지난 사람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러나 1793년 정조에게 올려진 화성의 기초설계도 '성설'은 성곽의 길이, 담의 높이, 옹성과 치성 같은 큰 틀의 밑그림만 기록돼 있을 뿐이다. 십자문양과 같은 건축물의 미시적인 부분까지 세세히 기록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다산은 성설을 올린 뒤 상을 당해 3년상을 치러야 했다. 3년상을 마치고 다산이 돌아왔을 때, 정조대왕은 천주교 신주를 없애고 그를 금정지역(충남 홍성)의 관리자로 전보한다. 따라서 화성건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해인 1794년에는 다산이 축성에 참여할 물리적 시간이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방화수류정의 건축을 지시한 사람이 정조이므로 이 십자문양은 오히려 정조, 아니면 화성유수부 조심태의 작품일 가능성이 있다. 그것도 아니면 방화수류정 건립에 참여한 백성 '공장'의 작품일 개연성도 크다. 조선왕실이나 자금성과 같은 궁성 안에서도 이런 문양은 흔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십자문양에 관한 전설이 내려오는 이유는 천주교가 자생적으로 태동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 나라의 경우 천주교의 유입은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이뤄지지 않았다. '천주실의'나 '칠극'과 같은 책을 통해 자생적으로 발생했다. 로마 바티칸이 한국의 천주교를 중시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방화수류정이 일본 관광객들의 떠드는 소리로 왁자지껄하다. 일본인들은 방화수류정에 올라 이리저리 '디카'를 눌러대는 중이다. 방화수류정 계단을 오르기 전에 왼편 벽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검붉은 벽돌 사이사이에 수놓인 십자문양이 하얗게 빛나고 있다. 십자문양을 향해 카메라셔터를 누르자 몇몇 관광객이 이쪽을 기웃거린다. 그들을 뒤로한 채 신발을 벗고 방화수류정 계단을 오른다. 마룻바닥의 나이테가 인공 속의 자연을 느끼게 해준다.
방화수류정 계단을 올라 정면으로 보이는 자리는 왕이 앉는 곳이었다. '왕의 자리'는 요철의 '凸'(철) 모양처럼 생긴 곳의 위로 볼록 올라온 지점이다. 그 다음이 정승의 자리였고 그 밑은 직급이 더 낮은 신하들이 앉아 회의를 하고 담소도 나눴다.
감히 왕의 자리에 앉아 본다. 올라오는 사람들을 신하처럼 바라보며 객기를 피워본다. 자리에서 일어나 사방을 둘러본다. 용연과 성곽, 그리고 수원시내의 모습이 정겹게 다가온다. 왕은 이 자리에 서서 '태평성대의 풍경'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싶었을 것이다.
/글·사진=김진국기자 blog.itimes.co.kr/freebird



■ 방화수류정의 여러 이름

정식 명칭은 '동북각루'백성들은 '용두각' 호칭


화성의 시설물중에서 가장 많은 이름이 있는 곳은 단연코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일 것이다. 말 그대로 풀이하면 꽃을 찾고 버드나무를 따라가는 정자라고 하니 그 풍류 또한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방화수류정은 조선시대 왕실 3대 정자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물론 문헌적 근거가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답사꾼들이 오랫동안의 현장 경험을 통해 가장 아름답고 풍류가 있는 곳을 경복궁 향원정, 창덕궁 부용정, 화성의 방화수류정이라 하고 있다. 그 중의 하나로 아름답기가 그지 없는데 이름마저도 철학과 풍류가 넘쳐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방화수류정은 사실 따지고 보면 별칭이라고 할 수 있다. '화성성역의궤'에 방화수류정이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실제 '동북각루(東北角樓)'라는 이름이 정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바로 화성 성곽 동북지역의 비교적 높은 위치에 있어 전투를 지휘하고 적들의 침입을 관측할 수 있는 각루라는 것이다.
이 이름 외에 민간의 백성들이 가장 많이 불렀던 이름은 바로 '용두각(龍頭閣)'이었다. 원래 '각(閣)'이라는 이름이 붙는 건물은 왕실에서 주로 많이 쓰인 곳은 널리 소식이나 배움을 알리는 용도의 건물에 쓰이는 이름이었다. 보신각은 날이 바뀌고 해가 바뀌는 것을 알리고 규장각은 배움을 알리는 곳이었기에 각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것이다. 방화수류정이 용두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용머리 형상을 하고 있는 용두암 위에 지어진 건물이자 그곳에서 정조가 행차하셔서 과거시험과 활쏘기 등을 하셨기 때문이다. 이 행사에서 기쁜 소식이 널리 퍼졌기 때문에 수원의 백성들은 용두각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용연정(龍淵亭)'이라는 이름이다. 방화수류정 밖에 있는 아름다운 연못이 바로 '용연'이다. 용의 형상을 하고 있는 바위 아래 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으로 아름다운 보름달이 오르는 때가 되면 수원의 백성들이 용연에서 달을 바라보았다. 그 얼마나 멋진 풍경인가! 공식적인 동북각루의 이름을 이렇게 아름다운 방화수류정, 용두각, 용연정이라 불렀으니 그 시대의 선조들이 오늘 각박하게 사는 우리들보다 백번 천번 멋있다고 할 수 있다.

/김준혁(수원화성박물관 학예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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