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의 꿈 강화 눈뜨다 / 8 몽고와의 협정-강화내성
강화산성 자리 내성 위치 … '3중성의 백미'라 칭호

궁궐 가까이서 왕조보호 임무 … 몽고 요구로 철거


48번 국도를 따라 강화대교를 건넌다. 카키빛 염하 위로 부서진 봄햇살의 조각들이 둥둥 떠다닌다. 강화군청, 고려궁지를 지나자 작은 삼거리가 나온다. 관청리, 신문리, 국화리의 분기점이다. 삼거리 한 켠, 산능선을 따라 오롯이 솟아 있는 성문. '강화내성'의 '서문'이다. 성문은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홍예문'이 뚫려 있다. 아치형의 문을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봄볕을 닮아 있다. 800년 전만 해도 고려군과 몽고군이 대치하던 곳이었다.
2차선 도로 건너편에선 '성벽'이 시작된다. 성벽은 산 정상을 향해 길게 뻗어 있다. 성벽에 사용된 돌은 불규칙하면서도 촘촘하다. 모양이 다른 크고작은 돌의 접합임에도 개미새끼 한 마리도 지나다니지 못할 정도로 완벽해 보인다.
성벽 중간으로 뚫려 있던 세 개의 홍예. '동락천 상수문'은 성안으로 들어오는 물을 처음 받아들이는 수문이다. 강화읍 서쪽 고려산에서 시작, 강화읍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관통하는 동락천은 그동안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대부분 도로로 덮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강화군이 상수문 지역을 생태문화길로 조성하고 있다. 머잖아 강화내성의 옛 모습을 만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동문'은 견자산과 북산을 잇는 성곽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다. 이와 함께 '북문'은 북산 서쪽 능선상에, '남문'은 남산의 동쪽 능선 사면 끝자락에 각각 자리하고 있다. 이들 성문들은 대부분 조선시대 '강화산성'이란 이름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이형구(67) 선문대 교수는 "강화산성은 고려 때 강화내성이 있던 자리 위에 그대로 수축하거나 개축하는 방식으로 지어졌다"며 "강화산성 자리에 똑같이 강화내성이 있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내성은 중성, 외성과 함께 '3중성의 백미'이다. 내성을 처음 쌓은 시기는 정확히 기록돼 있지 않다. 단지 몽고가 강화(講和)의 조건으로 성벽을 허물라고 요구한 데 따른 논의가 고종 46년(1259) 6월에 있었다고만 전해진다. 내성은 임무는 궁궐 가까이서 왕조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최우는 강화로 천도하기 한 달 전인 1232년 6월부터 궁궐을 쌓기 시작했으므로 동시에 내성을 축조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는 이처럼 3중성으로 무장한 채 몽고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런 고려만큼이나 몽고의 침략 역시 끈질겼다.
몽고는 1232년부터 1247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한다. 몽고의 4차침입 이후 고려는 모두 10번에 걸쳐 사신을 파견한다. 그러면서도 1250년 중성을 축성하는 등 방어시설을 더 견고하게 만든다. 이른바 '강온양면' 작전이다. 1251년엔 팔만대장경의 완성을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 해 7월 몽케(헌종)가 몽고의 황제로 등극하며 몽고는 고려에 대한 압력을 강화한다. 몽고는 1252년 고려에 사신을 보낸다.
"고려왕께서는 속히 개경으로 돌아가시라는 황제의 어명이시오."
몽고사신을 마주한 고려사신들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우리 고려는 당신들이 완전히 철수하기 전까지 절대 강도(江都)를 떠나지 않을 것이니 그리 알고 돌아가시오."
이 같은 고려의 태도는 몽고의 5차 침입으로 이어진다.
1253년 7월 '에쿠'가 이끌던 몽고군은 두 부대로 나뉘어 본군은 압록강을 건너고, 다른 부대는 동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온다. 철원, 춘천, 원주, 충주 지역은 물론 설악산에서까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고려는 강했고 몽고는 또다시 퇴각해야 했다. 1254년 '쟈랄타이'로 대장을 바꾼 몽고는 6차 침입에 나선다. 쟈랄타이의 공격은 1259년까지 계속됐다. 그 와중에 강화의 고려정부에서는 권력이동이 일어난다. 1258년 3월 대사성 유경과 별장 김준이 집정자 최의를 살해하고 권력을 차지한 것이다.
고려의 저항이 생각보다 심각하자 몽고는 국왕 대신 태자를 보내라며 조건을 완화한다. 전쟁의 장기화로 지칠대로 지친 고려는 사신을 파견해 태자의 입조를 약속한다. 1259년 몽고는 사신을 파견해 태자의 입조를 거듭 강요한다. 고종 46년(1259) 4월21일 훗날 원종이 되는 고려태자가 몽고로 출발했고 이로써 몽고의 고려침략은 사실상 종결된다. 강화천도 뒤 29년 만의 일이었다. 이후에도 고려의 독자적 국가의 정통성은 계속 유지된다. 이는 고려의 항쟁이 얼마나 치열한가를 몽고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몽고와의 강화를 참을 수 없었던 것일까 몽고와의 강화가 추진되던 1259년 6월 고려의 왕 고종이 재위 46년만에 돌연 승하한다.
강화내성이 무너진 것도 같은 해이다. 몽고사신이 성을 파괴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고려사는 '을유일에 성곽이 무너졌는데 소리가 빠른 우레처럼 여리(마을)를 진동하니 거리의 아이와 부녀자들까지 슬퍼 울었다'고 적고 있다. 내성을 뒤로 하고 돌아서는데 성이 무너지는 소리와 백성들의 통곡소리가 아프게 귓전을 때린다.

/글·사진 김진국기자 blog.itimes.co.kr/freebird
 
 
천도초기 기본 방어시설 목적
 
3천874척 규모 흙으로 축성
 
'강화 내성'은 현재 사적 132호로 지정되어 있는 '강화산성'을 가리킵니다. 내성은 고려 왕궁과 강화읍을 둘러싸고 있는 산성으로, 흙으로 쌓았으며 그 규모가 대단히 커서 강화읍 북산에서 남산에까지 걸쳐 있었습니다. 지금의 석축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조선 왕조는 처음, 고려 시기의 도성을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강화 내성은 개경(開京)에서 강화로 천도하자마자 궁궐을 지었던 고종 19년(1232) 6월부터 고종 21년(1234) 정월 무렵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성의 규모와 재료에 대해서는 16세기 '신증동국여지승람'이 둘레는 3천874척이고, 흙으로 쌓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천도 초기 기본적인 방어시설로 쌓았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고려왕조는 이때 전국 각 도의 도민과 장정을 징발하였으며 강화 산성을 송도(개경)의 성곽과 비슷하게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강화 북산을 개성의 송악산과 같은 이름으로 바꾸고 동쪽의 작은 산은 개경의 견자산을 따라 지었읍니다. 강도 송악산 아래에 신궁을 지어 '연경궁(延慶宮)'이라 하였으며, 성문들도 모두 개경 성문의 이름을 따서 지었습니다. 이는 고려 왕조가 강화로 천도한 이후 강화를 개경과 똑같이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려 왕성은 그러나 고려 왕조의 몽고와의 강화(講和) 이후 몽고의 강압에 의해 헐리고 말았습니다.
강화 내성에는 또한 고려산에서 발원하여 성 안을 지나는 동락천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동락천은 현재 복개 때문에 도로 밑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저는 학생들을 가르칠 때 문화재에 대한 개념을 다음과 같이 말하곤 합니다. "문화재는 청자와 같은 유물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문화재를 사랑하려면 물 한줄기, 흙 한 줌부터 사랑해야 한다. 그것들도 모두 소중한 문화재인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선문대학교 역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