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 남조선 정부가 6·25 전쟁 당시 북침한 사실을 감추기 위해 돌비석을 날조해 놓은 것은 아닐까?

 6·25 전쟁 이후 태어나 그 사실을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해 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렇지만 국립묘지가 비좁을 정도로 빽빽하게 서 있는 돌비석만으로도 전쟁의 참상만은 가늠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많은 국군 장병들이 인민군 군관들과 하전사들이 몰고 내려온 전차와 기총소사에 대항에 싸우다 산화했다면 전사자의 시체가 산하를 뒤덮었을 것이라는 정동준 계장의 설명이 허무맹랑한 거짓말같지는 않았다.

 그가 생각해 봐도 남조선 정부가 그 당시 죽지도 않은 사람들의 이름을 돌비석에 거짓으로 새겨 민족의 성역이라는 국립묘지에 이렇게 줄을 맞춰 세워놓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돌비석에 새겨진 이름의 숫자만큼 6·25 전쟁 당시 남조선 젊은이들이 죽었다면 아직도 남조선 인민들의 가슴속에는 전쟁의 응어리가 굳게 맺혀 있을 것이라는 말도 실감나게 들려왔다.

 인구는 앞으로 6·25 전쟁 참전 세대들을 만나면 정말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정동준 계장과 함께 사진전시실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순국선열들과 호국영령들의 생전의 활동상과 6·25 전쟁 당시의 실상을 담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인구는 정동준 계장을 따라 그 사진들을 둘러보다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그것은 6·25 전쟁을 통해 남과 북이 입은 전쟁의 피해가 어느 정도 되는가를 사진과 도표를 살펴보다 어렵사리 알아냈다는 점이었다. 공화국에서는 평생을 살아도 이런 사진들을 구경할 수 없을 것만 같아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인구는 그 사진을 통해 또다시 두 가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첫째는 6·25 전쟁 당시 국군은 26만 명이 사망했는데 비해 공화국 인민군대는 52만 명이나 사망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충격을 안겨 주었다. 국방군 사망자보다 공화국 인민군대가 두 배나 더 많이 사망했다는 사실이 정동준 계장의 설명처럼 공화국 군대가 먼저 남조선을 침범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셈이었다. 왜냐하면 전쟁에서는 늘 먼저 공격하는 쪽이 수비하는 쪽보다 희생이 크다는 사실을 그는 군사부 중대장을 통해 늘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두번째는 6·25 전쟁 중 남조선 일반 사민들의 사상자도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많았다는 점이었다. 피난 가다 하늘에서 떨어진 폭탄에 맞아 죽은 사람, 부상을 당해 산 속이나 들판에서 앓다가 외로이 죽은 사람,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굶어 죽은 사람, 결핵에 걸려 피를 토하며 죽어간 사람, 남북한 군인들에게 학살되고 납치된 사람, 부모형제를 잃어버리고 고아가 된 사람, 집과 옷가지마저 태워버린 채 헐벗고 있다 추위에 얼어죽은 사람,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진 사람, 전쟁통에 몸을 다쳐 평생을 불구자로 살아가는 사람까지 합치면 그 희생자가 500만 명이 넘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