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더 시간이 흐르면 기런 것들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날이 있을까?

 인구는 혼자 그런 생각을 해보다 정동준 계장을 따라 무후선열제단 앞으로 다가갔다.

 『이곳은 애국지사 중 후손도 없고 유해마저 찾을 길 없는 130여 순국선열들을 위패로 봉안해 놓은 곳이야. 찬찬히 한번 훑어 봐. 인구가 알고 있는 사람의 이름이 비석에 새겨져 있는지….』

 인구는 정동준 계장의 설명을 들으며 까만 돌비석에 새겨놓은 무후선열들의 이름을 살펴보았다. 그렇지만 3·1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는 유관순 열사나 고종황제의 친서를 가지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였다는 이위종·이상설 열사의 이름은 공화국에서는 들어보지도 못한 이름들이었다. 더구나 만주지역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는 홍범도 장군이나 오동진 장군의 이름도 공화국에서는 전혀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이름들이었다. 그래서 인구는 정동준 계장이 무엇을 물어도 대답 한 마디 하지 못한 채 계속 고개만 저어댔다. 정동준 계장은 맥이 빠진 듯 혼자 고개를 끄덕여대다 인구를 데리고 동쪽묘역으로 건너갔다.

 거기에는 6·25 전쟁 당시 조국을 수호하다 산화한 국군 장병들의 이름이 돌비석에 새겨져 있었다. 잔디밭 위에 가로와 세로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질서정연하게 서 있는 돌비석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정동준 계장은 인구에게 그 비석들을 찬찬히 한번 훑어보라고 했다. 인구는 정동준 계장이 시키는 대로 동쪽묘역 잔디밭 위에 서 있는 돌비석들을 살펴보았다. 비석 윗부분에 가로로 묘비 번호가 새겨져 있고, 그 밑에 세로로 언제, 어디에서 전사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그 반대편 표면에는 전사한 국군 장병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육군상등병 이일순의 묘 / 단기 4284년 5월 21일 근화지구에서 전사.

 인구는 돌비석 앞에서 단기(檀紀) 연도를 서기(西紀) 연도로 환산해 보며 잠시 서 있었다. 희끄무레한 대리석 표면에 음각으로 새겨진 내용들을 십여 분 이상 살펴보았는데도 단기 4283년 6월 25일 이전에 전사한 장병들의 묘비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대개가 다 단기 4283년 6월 25일 이후부터 휴전협정이 체결된 4286년 7월 이전에 전사한 국군장병들의 이름이 돌비석에 새겨져 있었다.

 전사한 지역도 거의가 다 38선 이남 지역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38선 이북지역의 지명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상하다. 어케 이 많은 사람들이 거의가 다 38선 이남지역에서만 전사했을까?

 인구는 정동준 계장을 따라 국립묘지 사진 전시관으로 걸어가면서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공화국에서 선전하는 것처럼 6·25 전쟁 당시 남조선 군대가 북으로 밀고 올라왔다면 38선 이북 지역에서 전사한 사람도 있어야 말이 맞아들어 가는데 그런 돌비석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이상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