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해? 왜 그렇게 넋이 빠져 있어?』

 인구는 자기 혼자 엉뚱한 짓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계면쩍게 씨익 웃으며 궁금증을 털어놨다.

 『이케 5장6기를 다 갖추고 사는데 왜 조금 전에는 아주머니가 잘 꾸며놓고 살지 못한다고 거짓말을 했습네까?』

 『음, 그것은 아주 잘 꾸며놓고 사는 다른 이웃집들보다 조금 못 산다는 상대적 평가이지, 생활에 꼭 필요한 가전 제품과 집기를 전혀 갖추지 못하고 산다는 말은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아까 김선영 주부에게 그런 사정까지 하며 인구에게 서울 시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고 하는 것 아니니. 왜, 못 꾸며놓고 산다고 해놓고 안에 들어와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니까 말과는 달리 너무 잘 산다는 생각이 들어?』

 『네.』

 『앞으로 좀더 살아 봐. 궁금해하던 자유대한의 실상을 속속들이 알게 될 거야.』

 안으로 들어갔던 김선영 주부가 벌겋게 잘 익은 수박을 조그마한 소반에 담아 들고 나왔다. 그녀는 다리 없는 소반을 그대로 거실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두 사람 앞에다 접시를 하나씩 놓아주었다. 인구는 잘 익은 수박을 보니까 금세 침이 꼬르륵 넘어가면서 먹고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왜 조그마한 접시를 정동준 계장과 자기 앞에 놓아주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김선영 주부가 수박을 먹으라고 권해도 정동준 계장의 눈치만 살피며 불안해했다.

 『오늘처럼 정장을 한 채로 수박을 먹을 때는 말이야, 먼저 정성스럽게 수박을 자라주신 분께 잘 먹겠습니다, 하고 감사의 인사를 한 뒤, 오른 손으로 수박 한쪽을 든 뒤 그 다음 앞에 놓아준 접시를 가지고 그 밑을 받치면서 수박을 깨물면 바지에 수박 물도 떨어지지 않아 좋고, 또 수박 씨도 정갈하게 한 곳에 뱉어낼 수 있어 위생적이고 편리하겠지?』

 정동준 계장은 여름철 남의 집에 초대되어 가서 수박 먹는 법을 가르쳐주며 먼저 시범을 보여 주었다. 인구는 그때서야 김선영 주부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네며 수박 한 쪽을 들고 깨물었다. 달큰한 과즙이 목 울대를 타고 넘어가면서 아득한 옛날을 떠올리게 했다.

 고등중학교 시절, 평양 혁명열사릉에 안장되신 할아버지 묘지에 추모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중앙당 간부과에 복무하던 평양 작은아버지 집에 들른 적이 있는데 수박은 그때 한번 먹어보고 처음 먹어보는 여름 과일이었다. 아버지가 사회안전부장으로 복무한 지 오래 되었지만 이렇게 수박을 냉동고에 넣어놓았다가 시원하게 만들어 먹어본 적은 없었다. 어쩌다 참외나 토마토 같은 여름과일을 간부배급소에 가서 특별히 배급받아 올 때도 있긴 하지만 배급량이 너무 적어 그냥 먹어치우기도 바빴다. 남조선처럼 냉동장고에 넣어 시원하게 해놓을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생전 처음 냉장고에 넣어 시원하게 해 놓은 수박을 먹어보니까 그 맛이 정말 기가 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