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준 계장은 잠시 동쪽묘역에 줄줄이 서 있는 6·25 전쟁 희생자들의 묘비를 지켜보다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인구는 나이 많이 잡수신 전쟁 체험세대들 앞에서 그런 질문을 받으면 북에서 교육받은 대로 말하지 말고 잘 모릅니다 하고 대답해. 그래야 부모형제와 처자식까지 잃고 지금까지 가슴에 응어리를 안고 사는 이곳 전쟁피해 세대들한테 곤욕을 당하지 않지, 그렇잖으면 아주 혼이 날 경우도 많을 거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이해 할 수 있겠어?』

 인구는 공화국의 김일성 수령이 민족해방전쟁을 일으켰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이 그런 질문을 하면 정동준 계장이 가르쳐주는 대로 대답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동준 계장은 인구를 데리고 서쪽묘역에 있는 충열대로 올라갔다.

 충열대는 구한말의 의병을 위시하여 3·1 운동 민족대표 열 다섯 분과 그외 독립운동으로 생애를 바친 애국지사 200여 명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는 곳이었다.

 인구는 정동준 계장을 따라 애국지사 묘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의 묘역을 살펴보다 자신도 모르게 무언가가 가슴 한곳을 쿡 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북에서 태어나 탁아소·유치원·인민학교·고등중학교를 거쳐 인민군에 초모되어 전연지대에서 군대 복무를 하면서 22년 동안 살았지만 우리 조선 반도는 평양의 혁명열사릉에 안장되어 있는 혁명열사들이 항일빨치산활동을 한 결과 일제 36년간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해방될 수 있었다고 믿고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남조선 서울에 있는 동작동 국립묘지에 들어와 충열대라는 곳을 살펴보니까 평양 혁명열사릉에 안장되어 있는 열사들 외에도 수많은 애국지사와 임시정부 요인들이 일제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생애를 바쳐 항일운동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인구가 공화국이라는 사회를 뛰쳐나와 얼떨결에 알게 된 역사적인 사실 중의 하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말 새로운 발견이었다. 그가 만약 공화국에 계속 있었다면 평생을 살아도 알지 못할 것 같은 새로운 사실들이었다.

 이것 외에도 인구는 남조선에 와서 20여 일 묵으면서 북에서는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을 많이 보고 들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것은 거지만 득시글거린다는 남조선의 서울이 공화국에서 선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 앞에 자기 눈을 의심할 지경이었다. 자신이 두 눈을 부릅뜨고 확인하고 또 확인했지만 서울은 가난해서 거지만 득시글거리는 곳이 아니라 너무 눈부시게 발전해서 높은 빌딩들과 자동차들만 빼곡하게 들어차 있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이렇게 발전하고 활기차 보이는 남조선의 서울을 공화국의 정치군관들과 신문 방송들은 왜 그렇게 사실과 다르게 악선전을 해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