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에서 넘어온 지 며칠 되지 않아 아직 이쪽 사정은 잘 모릅니다. 서울 시내 나들이도 오늘 처음이니까요. 그렇지만 머지 않아 다시 만날 수 있게 제가 주선을 해 드릴 테니까 오늘은 섭섭하시더라도 양해해 주십시오. 아직 돌아볼 곳이 몇 군데 남아서….』

 운전기사는 쾌히 승낙했다. 정동준 계장은 인구를 데리고 국립묘지 정문 쪽으로 걸어갔다. 관악산 동쪽 기슭을 따라 길게 뻗어 내린 공작봉 밑으로 동작의 능선이 넘실넘실 흘러가는 한강 물을 내려다보며 병풍을 치듯 3면을 감싸고 있는 국립묘지는 무성한 나무들과 잔디로 뒤덮여 있는 느낌이었다. 7월의 뙤약볕이 이글거리는 한낮인데도 공작봉 쪽에서 몰아치는 선들바람이 이마에 맺힌 땀을 식혀 주었다. 정동준 계장은 정문 오른쪽에 있는 위병소로 다가가 방문자 명부에 인구와 자신의 이름을 적은 뒤 충성분수대 앞으로 다가갔다.

 『이곳 국립묘지는 조국의 수호와 국가 번영을 위하여 고귀한 생명을 바치신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이 잠들어 계신 우리 민족의 성역이야. 이 성역에는 구한말의 의병들을 비롯하여 조국 광복을 위하여 투쟁하신 애국지사와 나라와 민족의 번영을 위해 평생을 바치신 국가유공자, 또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다 장렬하게 산화하신 국군장병들과 경찰관, 예비군 등 16만3천여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이 잠들어 계신 곳이야. 이곳에 올 때는 늘 울긋불긋한 색깔이 든 야한 옷이나 아랫도리가 훤히 드러나는 반바지같은 옷은 입지 말아야 하며, 자기가 아는 사람을 추모하기 위해 찾아왔다 해도 제일 먼저 저기 보이는 현충탑 앞으로 다가가 경건한 자세로 참배한 뒤 자기가 찾아보고 싶은 묘지로 들어가 추모해야 돼. 이쪽으로 따라와.』

 정동준 계장은 인구를 데리고 현충문 쪽으로 걸어갔다. 인구는 잔디광장 옆으로 나 있는 큰길을 따라 현충문 앞으로 다가갔다.

 문득 할아버지의 묘비가 서 있는 평양의 혁명열사릉 생각이 났다. 대성산유원지 주작봉 남서쪽 산중턱에 있는 혁명열사릉에는 김정일 동지의 생모인 김정숙 여사를 비롯해 항일빨치산들과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희생된 열사들이 묻혀 있고 이들의 반신상이 서 있었는데, 그 혁명열사릉과 비슷해 보이는 서울의 동작동 국립묘지는 평양의 대성산유원지 안에 있는 혁명열사릉보다 산세도 낮고 큰길가에 인접해 있어 소음도 심했다. 그렇지만 엄숙한 느낌이 들기는 평양의 혁명열사릉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구는 정동준 계장을 따라 현충탑 앞으로 다가갔다. 향을 피우는 대형 향로 앞에 다가서니까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 하고 비석에 새겨진 헌시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써늘하게 식혀오는 것 같았다. 인구는 정동준 계장이 가르쳐 주는 대로 향내가 풍기는 대형 향로 앞에서 두 손을 모아 배꼽 아래 붙이고 고개를 숙여 참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