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만댐의 선유와 겁에 질린 운전사

 단동시 중심부를 벗어나 구연성, 상첨자,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고 하는 호산장성(虎山長城)을 지나면 압록강 물줄기를 따라 개설된 도로를 달리게 된다.

 혼탁한 압록강 하류의 물과는 달리 이곳은 청둥오리 머리빛깔(鴨頭綠)처럼 물색이 맑고 한편으로는 북녘땅의 농가들이 한가롭게 펼쳐져 있다. 이곳을 지나면 북한땅을 밟아 볼 수 있는 태평만댐에 이르게 되는데 이 댐은 압록강 최하류에, 중국(측)에서 단독으로 건설한 댐이다.

 따라서 중국측에서 댐과 전기를 관리하기 때문에 압록강을 건너 중국이 관할하는 댐 남쪽끝, 북한땅까지 갈 수 있게 되었다. 이 지역 외곽에는 철조망이 가설되어 있고 그 밖에 인민군이 보초경비를 서고 있었다.

 태평만댐 안쪽에는 선착장이 있는데 이곳에서 탐사팀은 어선을 빌려타고 12㎞를 지나 수풍댐과 태평만댐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청성(淸城) 맞은편에 닿았다.

 일제는 이곳 장전(長甸河口)에 비행장을 건설하고 북한의 청성과 통하는 다리를 놓아 전수물자를 수송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6·25전쟁때 아군에 의해 폭파된 다음, 이 다리는 현재까지 방치되어 있는 상태다. 을씨년스럽게 압록강에 걸려 있는 청성교를 뒤로 하고 새로 개설된 강변도로를 따라 수풍댐으로 향했다. 이윽고 북한의 삭주에서 중국의 장전진(長甸鎭)으로 이어지는 압록강 철교 건널목 약100m를 남겨두고 도로에 문제가 생겼다. 그것은 전날밤에 내린 비에 도로변 바위가 무너져 압록강변쪽으로 간신히 차량이 통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압록강쪽 낭떠러지에 겁을 먹은 운전기사는 당나귀고집으로 일관, 결국 오던길로 되돌아 결국 반나절의 시간(?)을 허비하게 되었다. 결국 지도에도 없는 지름길을 가려다 자연의 심판으로부터 옐로 카드를 받은 셈이다.

▲세계 최대 발전용량을 자랑했던 수풍발전소

 수풍댐의 나이는 필자와 동갑으로 6학년3반 쯤이다. 보다 정확히 말해서 필자는 5월생이고 수풍댐은 10월생이므로 필자가 형인 셈이 된다.

 1937년 10월, 조선압록강수력발전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댐건설을 시작, 높이 106.4m, 길이 899.5m의 중력식콘크리트댐을 1943년 건설하였다. 그 결과 조성된 수풍호는 총저수량 1백16억t, 저수지면적 298㎢, 저수지둘레 1천74.4㎞, 댐으로부터 상류쪽으로 165㎞까지 걸쳐 있으며 당시 동양 최대의 댐이었다.

 1944년 2월까지 6대의 발전기가 설치되어 총시설용량 60만KVA로 각 발전기의 단위 용량 10만KVA는 당시 세계 최대용량이었으며 수풍호는 한국최대의 인공호수이다.

 1960년대부터 조·중압록강수력발전회사를 설립해 공동으로 운영·관리하고 있는 수풍발전소는 63만㎾(운봉:40만㎾, 태평만:19만㎾)를 발전한다. 사력댐으로 동양 최대이며 세계 4위를 자랑하는 소양강수력발전소는 20만㎾의 발전능력을 갖고 있으며 북한에서 발표한 금강산댐(4개 주댐과 7개 취수댐)의 발전량은 81만㎾이다.

 필자가 동갑내기인 압록강 수풍댐을 처음만난 때는 출생후 55년만인 1992년이었는데 당시에는 한·중국교가 수립되기 전이었고 수풍댐일대는 외국인 출입금지 지역이었으므로 접근이 불가능한 때였다.

 행사를 주관한 필자는 가이드에게 사정하고 반강압적으로 수풍댐을 먼발치로나마 구경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가이드는 어쩔 수 없이 「단 시간을 최소한 쟁취합시다」라는 전제 조건으로 수풍댐으로 인도하였다. 댐 바로 아래 마을에 이르니 군인들이 분주하게 내왕하고 있었으며, 일행은 「잘못 붙잡혀 북한으로 끌려 갈 수도 있다」는 공포심때문에 등골에 땀이 흥건하였다.

 압록강탐사대 일행은 차량이 길가에 정차하는대로 주위를 살펴가며 옥수수더미 뒤에 숨어서 먼발치로 수풍댐을 훔쳐보며 사진을 찍고 불이나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을 놓았었다. 지금도 그때 사진을 보고 철부지같고 위험천만한 행동에 고소를 금치 못하고 있다.

 각설하고, 압록강과 필자의 스토리는 한가지 더 있다. 그것은 필자의 석사학위 논문주제가 「압록강의 명칭과 하계망분석」(동국대 교육대학원)으로 교과서에 압록강의 길이 790㎞로 기록된 것을 925.5㎞로 엿가락처럼 늘려놓고 그 증거자료를 구체적, 실증적으로 제시했었다.

 이에 교육부에서는 「스승을 따르자니 사랑이 울고 사랑을 따르자니…」와 같은 격이 되어 고칠수도, 안 고칠 수도 없는 딱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쾌속정으로 달리는 수풍호 200리

 압록강의 국경하천(하구~백두산)으로서의 길이를 800㎞로 친다면 2천리가 된다. 그중 수풍호에서 그 10분의 1인 200리(약 72㎞)를 쾌속선을 타고 물보라를 일으키며 질주했다고 하면 그 기분은 어떠하였겠는가?

 그 꿈같은 탐사(?)가 금년 7월23일부터 30일까지 「제2차 테마여행 고구려 문화를 찾아서-압록강·백두산 탐사」때 현실로 이루어졌다.

 가천문화재단과 인천일보사가 공동 주최하고 단동훼리가 협찬한 이번 답사의 하이라이트는 수풍호 쾌속선 선유였으며 국내 최초로 시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반면 말할 수 없는 고난과 에피소드도 많았다.

 수풍댐에서 북쪽으로 고개 하나를 넘으니 아담한 만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이곳에 선착장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이곳에서 벽동, 창성, 초산사이에 여객선과 화물선이 운항되고 있는데 우리는 특별 쾌속정을 이용하도록 조치되었다.

 물보라를 일으키며 북녘땅 가까이 질주하는 쾌속선은 창성군 성풍, 벽동군 창주·벽동·벽단, 우시군 상평을 지나 진강(振江)입구에 도착하였다.

 오늘의 일정은 진강에서 버스가 대기하고 있다가 탐사대가 도착하는대로 태우고 고구려의 제2대 수도, 집안에서 숙박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나 약속시간이 지나도 버스가 나타나지 않고 13명의 탐사대는 길가에 걸터 앉아 마냥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서서히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것은 이 지역은 외국인 통제지역으로 이 지역 주민들은 가끔 북한 사람들은 만나보았으나 한국사람들이 무더기로 찾아와 길가에 앉아있는 것은 벽촌에서 흥미진진한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었던지-점차 사람들이 모여들더니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그리고 손짓 발짓, 한자로 의사소통을 시도하는 중에, 중국 국경수비대 대원이 찾아와 문제가 확대되었다.〈계속〉

이형석박사(교육학·지리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