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는 해방직후 극도로 인구이동이 혼란하던 때였다. 패망의 일인들이
물러가고 해외에서 귀환동포가 몰려오고 있었다. 그런때 어떻게 이같은
조사가 가능했는지 알수없으나 아뭏든 당시 공칭으로 25만이라 불리었었다.
이것이 정부수립 이듬해인 1949년 26만5천명으로 불어난다. 6·25동란이
발발한 50년에 다소 감소하다가 55년에 29만5천명이 되더니 60년
40만2천명으로 본격적인 인구의 증가시대를 맞는다. 그리고 70년에는
64만6천명으로 10년동안에 무려 24만명이 늘어난다. 그 5년후인 75년에
79만9천명이 되고 79년에 1백4만3천명-마침내 1백만명을 돌파 직할시
승격의 계기가 된다.
81년의 직할시 승격은 더욱 인구증가를 자극했다. 인구센서스에 의하면
86년 1백38만, 87년 1백44만, 88년 1백61만, 89년 1백75만, 90년 1백81만,
92년에 2백7만으로 드디어 인구의 2백만명시대를 맞아 오늘날 2백50만을
넘어서고 대구시 보다도 앞선다는 대가족을 거느리게 되었다.
이를 일러 인천이 전국의 3대도시로 부상했다고 칭한다. 서울과 부산에
이어 세번째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인천의 도시규모나
문화여건은 여느 도시에 비해 열악하다. 그러니 인구의 단순비교로
도시순위라 하기 곤란하다. 그런가하면 언제 인천이 다시 부산을 앞설지도
모른다. 최근 인천은 5%의 인구증가률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 인천의
증가률은 부산시 보다 높다. 앞으로 증가률이 어떻게 변할지 예측도 할 수
없다. 80년대 인천시가 내놓은 장기종합개발계획으로는 2001년에
1백90만이라 해서 완전히 빗나갔었다.
지금은 인력이 에너지원이던 원시농경시대도 인구가 국세나 시세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때도 아니다. 인구의 비대는 자랑이 아니요 오히려
부담이다. 주택 교통 교육 고용 등 도시문제나 파생시킨다. 특히 인천은
증가하는 인구를 수용할 터전도 비좁다. 행여 3대도시라고 우쭐할 일이
못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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