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공화국 국무총리를 지낸 운석 장면(雲石 張勉·1899~1966)박사 탄생

100주년(8월28일)을 맞아 기념학술회 추모미사 건국훈장 추서등 다양한

행사가 서울에서 있었다. 그리고 서울 일민미술관에서는 오는 27일부터

10월3일까지 운석의 생전 모습을 담은 사진과 유품을 전시한다.

장면박사는 인천시 동구 화평동에서 자랐다. 인천박문학교와 수원고등

농림학교, 미국 맨해턴 가톨릭대학을 나왔으며 해방후 제헌의원이 됐다.

이어 49년 초대 주미대사와 2대 국무총리를 역임했으며 60년엔 헌정사상

최초의 내각책임제였던 제2공화국 국무총리를 지냈다. 하지만 61년

5·16정변으로 9개월만에 실각, 6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인천의

근대사에서 운석만큼 큰 획을 그은 인물도 드물다.

 이번 기념행사를 계기로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그의 생애와

공적등에 대한 재평가가 보다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한다. 그는 민주주의

원칙을 존중하려한 선구적이고 양심적인 인물이었다. 제2공화국에서

추진한 국토개발사업과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제3공화국이 이어받아

추진한 점을 들어 경제개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에 맞는 개발전략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그는 우리나라의 UN가입을 성사시킨

건국 공로자이기도 했다.

 지금도 근대사를 이야기할때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역사의 구석구석에

그의 발자취가 어려 오늘의 산교훈이 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김대중 대통령도 추모사에서 「의인(義人)의 불멸이다」,

장박사의 위대한 인격과 경륜은 「역사에 영원히 빛날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그를 우유부단하다고 보는 측이 있는가 하면 결코 약하지 않았고

강한 신념과 실천의지가 있었다고 보는 의견도 많다. 이런 엇갈린

주장들은 앞으로 어떻게 정리되어 나갈지 궁금하지만 그의 생애를 되씹고

그가 남긴 교훈을 오늘에 되살려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인천시 동구청이 장면 박사가 유년기를 보낸 화평동

옛집을 복원하고 도로 이름을 「장면 거리」로 바꾸기로 하는등 인천의

정체성 찾기에 정성을 기울이고 있는 자체에 대해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천에서는 추모행사가 눈에 띄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

우리는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인천이 낳은 인물들의 발자취가 우리곁에

다시 살아나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