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문명은 모두 강변에서 꽃을 피웠다. 지금 세계적인 도시들도

대하를 끼고 있다. 런던과 파리가 그렇고 뉴욕 본 카이로 헝가리의

부다페스트가 그러하다. 우리의 서울을 비롯해서 크고 작은 도시와

소도읍까지도 대개 하천을 끼고 발달하고 있다. 이는 우연이 아니요 물이

생존의 절대 불가분한 존재요 그것을 강에서 쉽게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의 당연한 결과이다.

 그래서일까. 국내적이든 세계적이든 명작으로 평가되는 문학작품들은

강을 배경으로 하고 제목으로 하여 묘사한다. 도도히 흘러 내리는

강줄기처럼 그려지는 장편을 대하소설이라 이름 매기는 것도 그런

연유라할만하다. 박경리의 『토지』는 남도의 섬진강을

무대로 하며 채만식의 『탁류』는 금강을 이른다. 유주현의

『임진강』도 이미륵의 『압록강은…』은

강이름을 제목으로 한다.

 그러나 막상 강을 끼고 사는 오늘날의 사람들은 강의 고마움을 잊는다.

강의 근원과 은혜를 미처 깨닫지 못한다. 예전의 우리 선조들이 강에

순응하고 거스르지 않았던 점에 비하면 너무나 외람되다. 개울에서

빨래하고 여름철의 천렵과 첨벙거리는 하동이 고작이었지 훼손하고 더럽힐

줄은 몰랐다. 지금처럼 개발이라며 마구잡이로 하천을 일그러뜨리지도

않았다. 실개천을 복개하고 아무렇게나 하수구를 묻어 썩은 물을

흘려보내며 둔치에 둑을 쌓아 러브호텔을 들어 앉히지도 않았다.

 지난번 폭우때 동두천 시가지에 물난리를 겪게 한 신천만 해도 그렇다.

신천은 인근 각지의 개천물이 모여 한탄강으로 유입되는 맑고 깨끗한

하천이었다. 60년대만 해도 경원선 열차에 실려 연변을 달리노라면 넓은

벌판은 온통 평화로운 모래톱이었다. 그곳은 맑은때면 모래벌판이다가 큰

비가 오면 많은 물을 모아두는 자연저수지였다. 그러던 것이 처음엔

건축용이라며 모래를 퍼내고 벽돌을 찍더니 피혁 염색공장이 들어서고

제방을 쌓아 집을 짓느라 하폭이 좁아졌다.

 자연의 반격-지난 수해를 두고 우려하는 시각이 있다. 우리는 그동안

자연을 무분별하게 정복 이용했을 뿐 아니라 변질시키고 왜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