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능산스님 - 10화
 밖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고, 계곡물 흐르는 소리와 새 우는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렸다. 나는 하늘을 찌르듯이 서 있는 연화대를 올려다보았다. 어둠 속에 우뚝 서 있는 봉우리들은 연꽃이 활짝 피어 있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더구나 원효봉과 의상봉 사이에 보름달마저 덩그러니 걸려 있어서 한층 더 신비스러웠다. 나는 물 흐르는 소리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계곡물은 토굴 앞을 지나 마을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오월의 밤이었지만 잔잔한 물소리와 꽃냄새, 그리고 새 우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무릉도원에라도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
“아, 시원하다.”
나는 취기가 오르는 몸을 가누며 계곡을 따라 걸었다. 잠시 소로를 따라 내려가자, 개천을 건너는 돌다리와 함께 커다란 칼바위가 눈에 들어왔다. 칼바위 건너편에는 느티나무가 노쇠한 가지를 펼친 채 계곡을 굽어보고 있었다. 나는 술도 깨고 담배도 필 겸 칼바위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원효봉과 의상봉 사이에 떠 있는 보름달을 올려다보았다. 오랜만에 바라보는 달이었다. 아니, 세상을 쫓기듯 살다 보니 달을 바라볼 시간도 없었다. 달은 그저 밤하늘에 떠 있는 것이고, 언제나 우리 주변을 비추고 있다는 인식밖에는. 그러나 달은 그저 바라보는 대상만은 아니었다. 달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고 경외이고 가치였다. 조부는 달이 왜 경외스러워야 하고 거스를 수 없는 대상인지 가르쳐 주었다. 아니, 달의 존재와 가치에 대해 말했다.
“달은 역사이고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이다. 그러니 그 흐름에 역행하지 말고 순응해야 한다. 만약 그 흐름에 거스르면 삶은 고통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나는 그때 조부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그 말 자체를 무시했다. 달이 어떻게 자연의 역사이고 인간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는 말인가. 달은 그저 밤하늘을 비추는 일개의 별일 뿐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달의 의미는 그것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조부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달의 존재 이유를 분명히 알 것 같았다. 달은 하늘을 장식하기 위해서 떠 있는 게 아니라, 삼라만상에 질서와 균형을 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달의 존재 자체를 망각하고 살아왔다. 아니, 달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하늘에 떠 있는지를 간과했다. 그것이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길이었다. 새가 또 다시 울었다. 나는 담배를 꺼내 피워 물었다. 능산을 따라 이곳까지 왔으나, 여기가 어디인지 그리고 무슨 이름을 가진 동네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능산이 한때 참선을 하며 머물던 곳이라는 사실밖에는. 문득 소동파의(蘇東坡)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人生到處知何似
應似飛鴻踏雪泥
泥上偶然留指爪
鴻飛那復計東西.
(사람 사는 것은 무엇을 닮았을까
날아가는 기러기 눈이나 진흙 밟는 것과 같은 것을
진흙 위에 우연히 발자국 남기지만
훌쩍 날아오르면 또 어디로 갈 것인가.)
어떤 사람은 향기를 남기고 어떤 이는 이름을 남기고 죽는데,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근무한 여경과 물의를 일으켜 사표를 내고, 재일교포 삼세인 아내에게 이혼까지 당했다. 아내 유키코는 어린 여경을 임신시킨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더 이상 나를 신뢰할 수 없다며, 어린 딸을 데리고 일본으로 들어가 버렸다. 내 인생은 유키코가 따나갈 때부터 쇄락을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혼 후, 퇴직금 전액을 투자해 벌인 사업은 빛을 보지도 못하고 쓰러졌고, 전 재산을 몽땅 털어넣은 사업도 어이없이 무너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