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양식은 하나의 범전(範典)에서 출발하기 마련이다. 이상적 사실미의 극치를 보여주는 그리스 조각의 근원은 이집트 조각에서 찾아볼 수 있고 르네상스 미술가들이 내건 기치는 고대 그리스 로마 조각의 인본주의 미술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우리의 경우를 보더라도 「광주 철불좌상」이라든가 「부석사 소조여래좌상」등 9세기 이후의 수많은 불상들이 「석굴암 본존불」을 범전으로 만들어졌음은 미술의 이러한 속성을 입증시켜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단순한 인과율로 연역해 볼 때 추상미술은 사진술의 등장으로 입지가 묘연해진 화가들이 활로를 모색하기 위한 방법적 수단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추상미술이 과거 원근법적인 시각과 3차원적인 이미지의 재현이라는 안정된 패러다임을 해체한 결과 인간사고의 폭과 깊이의 확대 그리고 사회발전에 공헌한 예기치 않은 성과를 거두었던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그림속에 풍부한 이미지와 물질공간, 다양한 형식, 그리고 철학·문화·정치적 문제를 부각시킴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결국 형식적인 측면에서 추상미술은 구상미술과 함께 미술양식의 양대 범전으로 확고히 자리매김되기에 이른다.

 하관식(河觀植·54)교수는 이러한 추상미술을 범전으로 자신의 조형감각을 구현해 나가는 전형적 모더니스트이다. 그는 서술적이고 지난한 삶의 형태보다는 해와 달 그리고 별빛이 만들어내는 조용한 빛과 그림자 그리고 은밀함의 조화에 관심을 갖고 작업해 왔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단순히 매체의 물성에만 탐닉하고 「미술자체」에 순수가치를 둔 폐쇄적인 의미의 모더니스트 페인팅(Modernist Painting)은 아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세계를 이해시킬 때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점에 동의한다. 톨스토이나 허버트 리드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예술이란 스스로의 삶을 통해 얻어진 느낌과 정서를 형식적 표현수단에 의해 의도적으로 전해주는 인간에게 존재하는 활동이며 표현된 느낌들이 남을 이끌어 들이고 그러한 감정을 공유케 하거나 경험하고 인식하도록 하는 일이 커뮤니케이션이다」 나의 작품활동은 끊임없는 자신과의 커뮤니케이션이거나 독백이 되기도 한다.』

 필자는 지난주 하관식의 작업실에서 80~90년대에 그린 작품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그는 뜨거운 직관력과 차가운 이성을 겸비한 화가라는 것을 느꼈다. 그 이유는 물감을 캔버스에 바르는 과정중에 필연적으로 드러나는 긴장감 속에서도 그는 감정을 억제하고 차분히 그림을 마무리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말하자면 하관식은 언제 붓을 놓아야 하는 가를 분명히 아는 화가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서정적 추상이든 기하학적 추상이든 높은 완성도를 지닌다. 고도의 미술감각과 치밀한 구성능력 그리고 완성도를 요구하는 국전(미술대전 포함) 추상화 부문에 수차례의 입선과 3회의 특선 경력이 이를 입증해주고 있다.

 아울러 그는 70년대 이후 「한국 미술초대전」 「창작 미술협회전」 「아시아 국제미술전」 「현대미술초대전」 「예술의전당 개관기념 초대전」등 권위있는 전람회에 수십회 초대 출품함으로써 한국의 중요한 추상화가로서 그의 인지도를 확인시켜왔다.

 하관식은 화가로 성장하기에 매우 유리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아버지 하기영(河己泳·전KBS방송국장)은 아마추어 화가였고 어머니 최순경(崔順卿)은 7남매나 되는 자식들의 소질을 발견하고 이를 살릴 수 있도록 조언해 주는 다정다감한 분이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한국 현대미술의 중요한 작가 중 한사람인 경기대 하영식 교수가 그의 둘째 형이다.

 『나의 기억속에 나를 감동시킨 첫번째 작품은 형님의 수채화이다. 전복껍질과 빨랫비누, 그리고 작은 항아리가 그려진 정물화…. 제주도 피난시절, 국민학교를 갓 입학한 때 형님의 그림에 묘사되어 있는 항아리의 볼륨감과, 속으로 빨려들어 가듯 표현된 명암의 은근한 조화는 나를 감동시켰다.』

 이러한 가정분위기 속에서 집안에 널려있는 일본의 화집 또는 전문지 「미술수첩」등을 통하여 서구 현대미술의 동향을 접하게 되었고 하관식은 당연히 이러한 조류에 영향을 받는다. 또한 용산중·고 재학시 그의 미술교사는 임규삼 화백으로, 일본 태평양 미술학교를 졸업한 화가였는데 하관식은 선생님의 작업실에서 그의 작품을 훔쳐보며 화가로서의 꿈을 구체화시켜 갔다.

 대학 재학 시절의 지도교수는 최덕휴 화백이었으나 그에게 주로 영향을 끼친 화가는 강사로 그를 지도한 유희영(현 이화여대 미술대학 학장)과 서울대 교수인 유경채 화백이었다.

 아울러 해외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국제적 안목을 키워왔던 장두건, 권옥연, 김흥수 등의 잇따른 귀국전은 대학시절 감수성 많았던 하관식에게 영향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그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그들의 기지(機智)를 배우고, 그림을 그려가면서 교육하는 실천적인 교육자이기도 하다. 〈이경모·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