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6일 안양대 강화캠퍼스서 국제학술대회
 한국양명학회(회장·정인재)가 오는 15·16일 이틀간 강화도 안양대학교 강화캠퍼스에서 ‘강화 양명학파’와 관련한 국제학술대회를 연다.
 이번 학술대회는 ‘양명학’을 주제로 한 첫번째 국제학술대회로 중국을 비롯한 일본, 싱가포르, 캐나다 등 국외학자들과 국내 20여 개 대학 역사·철학 교수 45명 등 국내외 학자들이 대거 참여한다.
 ‘양명학’은 통치철학으로 주자학만을 받아들였던 조선시대 이단으로 배척받았던 학문이다. 소론 계통의 하곡 정제두(1649∼1736) 선생이 말년을 강화도 하일리에 보내면서 체계화했으나, 사문난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하던 서슬 퍼런 시대라 밖으로 드러내지 못했다. 아들에서 또 그 아들로, 지인에서 또 그 지인으로 이어진 한국 양명학은 1930년대 실학의 거두 정인보 선생에 이르러 공개적인 연구가 가능했으나 여전히 ‘가문학’(家門學) 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일제시대엔 조선시대 전통사상 연구는 더 이상의 진전이 없었고, 조선의 ‘주자학’ 또한 왜곡·변질된 해석으로 점철됐으니, ‘한국양명학’은 설자리가 없었다.
 50년대이후 동양철학이 학술무대에 들어서며 연구활동이 시작돼 1995년 한국양명학회가 구성되고나서야 빛을 보기 시작한 양명학은 이번 국제학술대회를 계기로 ‘가문학’을 넘어 학회 중심의 연구활동이 예상된다. 특히 한국 양명학의 태동이 강화도에서 이뤄졌으니, 그 중심에 강화가 설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양명학이 갖는 철학적 의의와 ‘강화 양명학파’를 근간으로 한 한국 양명학이 학술사상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분열된 한반도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세계화된 현대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해 논의하게 된다.
 ▲양명학은
 주자학과 함께 신유학의 한 사조(思潮)를 일컫는 말이다. 주자학은 중국 송대(宋代) 이학(理學)을 가리키고, 양명학은 명대(明代) 마음의 학문, 즉 심학(心學)을 말한다. 두 학문 모두 스스로 공부를 통해 사사로운 욕심을 없앰으로써 성인(聖人)의 경지에 오르는 것을 궁극의 목적으로 하고 있지만 그 공부방법에 대해서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양명학은 주자학을 공부하던 왕양명(王陽明)이 주자(朱子)의 ‘격물치지설’(格物致知設)에 회의를 느끼고 ‘지행합일설’(知行合一設)을 주창하고 나오면서 시작된다.
 양명학은 인간이면 누구나 본심(本心)을 가지고 있고, 사사로운 욕심으로 본심을 가리지 말아야 할 것을 강조한다. 이 때문에 양명학자들은 복잡한 격물치지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주자학과 달리,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 공부를 하기 이전에, 그 것을 바르게 볼 줄 아는 마음을 ‘양지’(良知)라고 하는데, 정인보 선생은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자신은 속일 수 없는 마음”, 즉 하늘이 선천적으로 준 천리(天理)라 했다.
 양지는 마음의 본체인 동시에 시비를 판단하는 표준이다. 지각과 지식에 근거한 합리적 ‘이성’을 강조하는 서양철학과 달리, 옳고 그름으로 ‘행’(行)함을 결정짓는 ‘도덕적 주체’인 것이다.
 ▲강화학파
 주자학은 조선시대 500년 역사를 이끌어온 통치철학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 본질보다는 ‘권력가’들의 철학으로 이용됐다.
 양명학자들은 통치철학으로 틀에 맞춰 짜인 이데올로기로 왜곡된 관학(官學)이 바로 조선시대 주자학이었다면, 양명학은 사민(四民·士農工商) 평등을 역설하며 백성을 가까이 하는 민학(民學)이었다고 말한다. 백성을 새롭게 하고자 했던(新民) 목적은 같으나, 그 실행방법에 큰 차이를 보인다. 양명학자들은 조선시대 주자학을 ‘교조주의’라 비판하고 있다.
 조선시대 주자학자들은 통치철학에 정면대응할 수 있는 논리로 양명학을 받아들였고, 불교와 함께 이단으로 배척했다.
 양명학이 조선시대 유입된 때는 중종 16년(1521년)으로 잡고 있으나 아직 정확지 않다. 서학(西學)과 비슷한 시기에 조선시대 사상계의 비주류로 자리잡았고, 하곡 정제두에 이르러 체계화됐다.
 하곡 선생은 “오늘날에 주자학을 말하는 자는 주자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주자에 기탁하는 것이요, 주자를 끼고 위엄을 지어 그 사사로움을 이루는 것이다”라며 당시 권력화 돼가던 주자학을 비판하고 자신의 ‘양지’에 따라 양명학을 선택했다.
 하지만 주자학에 벗어난 학문은 사문난적으로 몰리던 당시, 겉으로 드러낼 수 없었다. 양명학이 ‘가문학’에 머문 이유다. 초기 하곡의 아들 정후일과 고손인 정문승, 정기석, 정원하로 이어진 강화학파는 이후 이광사, 이시원, 이건창, 이건방 등을 통해 실학의 대두 정인보로 이어져 내려왔다.
 ▲왜 양명학인가
 하곡 정제두 선생은 “흐린 물이라 해서 어찌 본체의 맑음이 없겠는가?”라고 말한다. 이 말은 흐린 욕망속에서도 깨끗한 ‘양지’는 결코 없어지 않는 것을 뜻한다. 마음의 본체인 동시에 그 작용이바로 ‘양지’인 것이다.
 때문에 양명학자들은 ‘강화양명학’이 계량화된 현대 사회에 꼭 필요한 학문이라고 역설한다. 자신의 양지에 비추어 작은일에서부터 가식없는 실천을 말하는 양명학이 급속한 근·현대화로 인한 우리 사회의 ‘몰가치성’을 치유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우리 사회에 새로운 윤리관으로서 양명학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접근은 환경문제에도 적용된다. 양명학은 자연을 수량화해 마음대로 재단해 버리고 마구 파괴하는 현대사회를 또한 비판한다. 인간의 사사로운 욕심으로 자연을 하나의 물질로 보지말 것을 권한다. /왕수봉·김주희기자 kimjuhee@incheo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