⑪ 이용익과 서상집
인천항신상협회(仁川港紳商協會)를 이야기하자면 이용익(李容翊)과 서상집(徐相潗)과의 관계를 먼저 파헤쳐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인천신상협회는 1896년 11월, 일본의 상권 침탈에 대항해서 인천항의 객주, 진신(縉紳)들이 조직한 상인 단체였다. 이 신상협회는 서상집이 주동이 되어 설립했는데, 그 내용은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에서 펴낸 ‘고려대학의 사람들’ ‘이용익’ 편에도 나온다. 즉 ‘인천항신상협회는 구한말 내장원경(內藏院卿)이었던 이용익의 재정적 뒷받침을 받아 서상집이 설립했다’는 내용이다.
이용익은 조선 상인들도 하여금 자금을 모아 조합이나 회사를 설립하도록 주선하여 우세한 일본인들의 자본력에 맞서게 했던 인물이고, 이에 대해 서상집은 인천 객주로서 순신창(順信昌)의 대리인을 비롯해, 한때 상해에서 석탄 무역으로 큰 부를 거머쥐기도 한 전형적인 상인이었다. 이 두 사람이 어떻게 관계를 맺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이용익이 인천 전환국 국장으로 있을 때 서상집이 그 밑에 기사로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원래 상인 출신이었던 이용익과 서상집이 이미 전부터 친면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밖에 두 사람에 관련한 이야기로는‘개항과 양관 역정’에 ‘서상집이 상해에서 귀국하여 또 다시 큰돈을 잡았으나 무슨 까닭인지 내장원경 이용익으로부터 늘 돈 재촉을 받았으며 가끔 그 고관이 보내는 경찰을 피하느라 미국 상인 타운센드의 집에 숨어 며칠씩 묵었다’는 뜬소문 같은 내용이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아마 서상집이 이용익과의 관계를 이용해 모종의 금전 문제를 일으켰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두 사람에 대해 좀더 살펴보면 이용익은 자주 경제(自主經濟)에 힘썼던 애국자이면서 청렴하고 충성스러워 고종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로 이준(李儁) 열사 일행을 헤이그에 잠입시키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고, 서상집은 1902년 7월5일부터, 재임 불과 40여 일이었지만 일개 객주에서 인천감리(仁川監理)를 지낼 만큼 처세에 능하고 상재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서상집의 감리직이 왜 그렇게 단명했고, 또 금전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용익은 후일 러시아 땅에서 죽으면서 “독립권을 회복하기 전에는 관을 옮겨 귀국치 말라”는 유서를 남겼고, 서상집의 아들 일가는 광복 후 친일 혐의로 중국 땅에서 독립군 손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민족 상권을 지키기 위해 한때 같은 길을 걸었던 두 사람의 뒷날은 이렇게 달랐던 것이다. /시인 eoeul@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