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 표현하는 그만의 미술세계

<33>김인환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한 김인환(金仁煥ㆍ62)교수는 화가로서의 입신을 포기한 이유를 「붓을 씻는 일이 지겨워서」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사실은 당시 감당하기 어려웠던 경제적 여건이 주 동기였다고 말하고는 겸연쩍게 웃는다.

 그가 미술평론으로 입문하기까지는 대학에서의 은사이며 인천에 연고를 둔 이경성(李慶成ㆍ본보 98년 8월14일자 참조)교수의 도움이 컸다.

 1960년대 초 홍익대 졸업과 동시에 그는 경기매일신문, 인천신문 등에 평문을 기고하며 당시 인천 예술인(주로 문인, 화가)들과 폭 넓은 교류를 가지며 영향을 받는다. 시인 한상억(韓相憶) 최병구(崔炳九) 손설향(孫雪鄕) 낭승만(浪承萬), 문학평론가 김양수(金良洙), 수필가 최정삼(崔定三), 화가 우문국(禹文國) 김상유(金相游) 박영성(朴瑛星) 이철명(李哲明) 조평휘(趙平彙), 서예가 류희강(柳熙綱) 장인식(張仁植) 등이 그들인데 이들의 면면은 김인환교수의 교우 폭과 함께 젊은 시절 그의 지적ㆍ예술적 편력의 단면을 나타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한편 그는 고교 시절부터 서울 명동을 드나들며 당시 용산고등학교에 재학중이던 신동우(申東雨ㆍ만화가) 송영방(宋榮邦ㆍ조각가) 등과 교류하였고, 만화나 삽화에 취미를 가져 만화가 김성환(金星煥) 정운경(鄭云耕) 등과 접촉을 갖기도 한다. 그리하여 한 시기에는 만화가로 변신하여 일간신문에 연재만화, 시사만화, 혹은 삽화를 그린적도 있다.

 이어 1965년 신아일보 편집부 기자로 입사함에 따라 신문지면을 할당받아 본격적인 미술시평을 쓰기 시작한다. 이후 「공간」 「신동아」 「주간조선」 「월간중앙」 「문예진흥」 「한국문학」 「계간미술」 「미술세계」 「가나아트」 「예술계」 「문화예술」 등에 고정적인 시평란을 두고 평론활동을 전개해 간다.

 김인환은 1937년 함경남도 단천에서 김성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선조 귀양지로 널리 알려진 백두산 기슭의 삼수갑산(三水甲山)의 오지 삼수에서 해방을 맞이한 그는 공산치하의 고향에서 잠시 인민학교(초등학교)에 다니게 된다. 그러나 공산치하를 탈출하여 이미 인천에 정착한 아버지를 찾아 1947년 38선을 넘어 월남한 그를 아버지는 인천국민학교 3학년에 편입시키게 된다. 이어 인천 중ㆍ고를 졸업하는 그는 1957년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서양화과에 입학하여 화가로서의 꿈을 키워가게 된다. 재학중 그를 지도한 교수는 손응성(孫應星) 한묵(韓默) 이봉상(李鳳商) 김환기(金煥基) 이종우(李鐘禹) 등이었다. 그러나 집안 사정은 그에게 화구를 충분히 제공할 만큼 넉넉지 못하였다. 결국 그는 한편으로 소설가를 꿈꾸기도 하면서 학내 교지에 단편소설을 몇 편 발표하기도 하고 「문학의 밤」 행사에서 수필을 낭송하면서 미술학도보다는 문학도로서의 자질을 키워간다. 대학 재학시에 교우한 친구들도 미술가보다는 시ㆍ소설ㆍ무용평론으로 입신한 이제하(李祭夏) 김영태(金榮泰) 등이었다. 미술을 전공한 그가 인천미협이 아닌 인천문협에 가입하고 문인행세를 한 것도 그의 표현대로라면 한 시기의 치기(稚氣)였는지도 모르나 이런 점은 화가로서보다는 글쓰는 평론가로서의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하고자 하는 그의 태도를 보여주는 점이라 하겠다. 말하자면 그는 선배 문인ㆍ화가들과 어울려 신포동 시장 골목의 백항아리 집, 은성다방 등을 출입하면서 문학적인 지기와 낭만을 키워왔던 것이다.

 1970년대 이후 그는 홍익대 중앙대 경희대 서울시립대 등 여러 대학에서 미술이론을 강의하는 한편, 1981년 조선대 미대 조교수로 부임하여 부교수, 교수를 거쳐 현재 초빙교수로 출강하고 있다. 아울러 그는 국전, 대한민국 미술대전, 동아미술제, 중앙미술대전 등 각종 공모전과 서울시 문화상 등의 자문위원, 심사위원을 맡으며 미술행정을 자문해 왔다. 이어 그는 문예진흥원, 예술의 전당 자문위원 및 심사위원, 한국 미술협회 평론분과 위원장을 역임하고 미술평론가 협회 회원으로 활동중이다.

 한편 그는 1981년 프랑스 카뉴국제 회화제 커미셔너로 참석하고 약 3개월에 걸쳐 구미 미술계를 돌아 볼 기회가 있었다. 이어 1989년 한중 문화세미나(중국 옌벤 사회과학원), 1990년 구 소련 레닌그라드 아카데미(현 페테르브르크 레핀대학)세미나, 1993년 아이카(AICAㆍ국제 미술평론가 협회) 제37차 총회(프에르토리코 상환시)에 참석하여 국제적 안목을 키우고, 또 자문에 응해왔다.

 「예술이란 삶의 일부이며 생활의 연장으로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예술가들의 무덤순회를 좋아하는데 반 고흐(Van Gogh)의 무덤을 들를 때 마다 그 짧으나마 치열하게 살다가 간 영혼 앞에서 전율 같은 것을 느낀다. 만주 용정에 있는 윤동주의 묘에 들렀을 때는 그 결벽증에 가까운 시인의 순수한 영혼 앞에서 나 자신이 부끄럽기만 했다. 일찍이 러시아 작가 푸쉬킨이 평론가라는 직인을 일컬어 「말 꼬리에 붙어 다니는 파리」정도로 비하한 적이 있는데 이렇게 폄하받는 직업이라 하더라도 문화창조에 다소나마 도움을 준다는 신념을 가지고 살아왔다. 이 시점에서 돌이켜 보면 크게 내세울만한 실적도 없이 허둥대며 지내왔다는 자괴감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다. 남은 기간이 얼마 될지 모르겠으나 이제부터라도 본질을 찾아 겸허하게 자성하는 자세로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천장이 내려앉을 것 같이 초라한 신림동의 한 대폿집에 마주앉아 소주잔을 나누며 후배에게 전하는 일성이었다. 〈이경모ㆍ미술평론가〉약력

1937 함남 단천 출생

1957 인천 중ㆍ고 졸업

1963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1965~67 신아일보 편집부 기자

1968~현재 공간, 미술세계, 계간미술, 문예진흥, 인천일보 등에 고정미술 시평

1973~81 홍익대, 동국대, 중앙대, 경희대 대학원 강사

1974 한국미술協 평론 분위원(장)

1980~99 문예진흥원, 예술의 전 당자문위원, 심사위원 국전, 미술대전 자문위원 및 심사위원

1981 조선대 교수 부임, 카뉴국제 회화제 커미셔너

1993 아이카(AICA) 제37차 총회 참석

1989~현재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초빙교수

저서 「동서 미술의 흐름」(전6권)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