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가 된 조국에 방산·원전 산업 씨앗 뿌리다

6·25전쟁서 北 탱크에 속수무책
대적 가능 무기 제조 필요성 절감

1958년 국방부 적극 호응 힘 입어
병기공학과·응용물리학과 신설
1960년 국내 최초 로켓 개발·발사

정치적 격랑 속 4년 만에 폐과 불구
'로켓반' 공학도 우주항공 분야 성취

#1. 국산 우주 발사체 누리호가 실제 인공위성을 우주로 실어 나르는 '첫 실전 발사'에 성공했다. '인공위성 고객'을 무사히 우주 궤도에 올리는 데 성공하면서 민간 기업이 우주 개발을 이끄는 '뉴스페이스(New Space)' 시대로의 첫발을 내디뎠다. 국가와 민간이 함께 개발한 기술을 활용해 우리 땅에서 우리 기술로 만든 로켓으로 우리 인공위성을 우주로 쏘아 올리는 '우주 강국'의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이로써 한국은 자력으로 위성을 발사할 수 있는 일곱 번째 국가가 됐다. - 2023년 5월26일 조선일보.

 

#2. 오랜만에 우리나라 하늘에 로케트가 솟아올랐다. 인하공대 병기공학부에서 제작한 IITO-2A와 1A의 발사가 19일 하오 성공한 것이다. 이날 서민호 민의원 부의장, 이홍종 국방부 과학연구소장을 비롯하여 학교 관계자 여러 학교와 학생 대표 및 수천 관중이 모인 가운데 인천 근교 송도 발사장에서 거행된 동 시사에서 3시50분 2A호가 폭음도 요란히 하늘 높이 솟아올라 초조히 결과를 기다리던 관중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 두 로케트는 그동안 15명의 동 대학 로케트반이 대한 우주항행협회 국방부과학연구소 등의 기술적인 협조로 제작에 성공한 것으로 학생들과 여러 연구단체 또 학교 당국의 제작비 제공이라는 이상적인 케이스로 제작이 순조로워 크게 일반의 주목을 끌어온 것이다. - 1960년 11월20일 동아일보.

약 63년의 시차를 두고 발생한 위 두 차례의 로켓 발사는 우리나라 우주항공 기술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일대 사건이다. 특히 한국의 초기 로켓 연구개발에 인하공대 병기공학부가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인하공과대학은 1954년 4월24일 개교하며 기계공학과·조선공학과·광산공학과·금속공학과·화학공학과·전기공학과의 6개 학과로 출범했다. 4년 후인 1958년 1월28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병기공학과와 응용물리학과(원자력공학 전공)가 추가 설치됐다.

▲ 1959년 7월14일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 홍릉에서 열린 우리나라 최초의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Ⅱ(TRIGA MARK -Ⅱ)' 기공식에서 첫 삽을 뜨고 있다. 왼쪽은 1954년 2월 문교부장관으로서 인하공대 설립 기성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김법린 초대 원자력원장. /사진출처=<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 1959년 7월14일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 홍릉에서 열린 우리나라 최초의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Ⅱ(TRIGA MARK -Ⅱ)' 기공식에서 첫 삽을 뜨고 있다. 왼쪽은 1954년 2월 문교부장관으로서 인하공대 설립 기성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김법린 초대 원자력원장. /사진출처=<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설립 당시의 6개 학과는 6·25전쟁 이후 공업 기반이 사실상 전무했던 우리나라 재건과 이를 위한 기술자를 양성하기 위해 공학의 기초라 할 수 있는 필수 분야였다. 공장을 지어 기계를 돌리려면 기계공학 기술 인력 양성이 시급했고, 기계의 필수 재료인 금속을 다루는 금속공학, 금속 원재료인 광석과 석탄을 발굴하기 위한 광산공학, 기계를 돌리는데 꼭 필요한 전기를 생산하고 운용하는 전기공학, 천연자원으로부터 생활필수품을 만드는 기초 기술인 화학공학, 3면이 바다인 한국에서 물자를 수송할 배를 만드는 조선공학과는 가장 요긴한 분야였다.

6·25전쟁 직후 경제 기반이 송두리째 파괴됐고, 자립자족 경제를 위한 생산 기반 시설도 확충하지 못한 실정이었다. 국가의 당면하고 절실한 정책은 과학 기술 교육의 실천과 과학 기술자 양성을 위한 공업 생산 교육이었다. 공업 대학을 설립하려는 이승만 대통령의 구상은 1952년 12월 중순 김법린 문교부 장관에게 인천에 MIT와 같은 최고 수준의 공과대학의 설치를 지시하고 이듬해 3월 설립기성위원회를 구성하면서 구체화됐다.

휴전을 코앞에 둔 1953년 6월4일 이승만 대통령은 피란지 부산 정부청사에서 라디오를 통해 '인하대학의 설립에 관하여'라는 담화를 발표했으며, 그 이듬해인 1954년 4월24일 제1회 신입생 입학식을 거행했다.

▲ 1958년 신설된 인하공대 병기공학과 주도로 국내 최초 개발된 'IITO-2A' 로켓이 1960년 11월19일 송도 앞바다에서 성공적으로 발사됐다./사진제공=인하대학교박물관
▲ 1958년 신설된 인하공대 병기공학과 주도로 국내 최초 개발된 'IITO-2A' 로켓이 1960년 11월19일 송도 앞바다에서 성공적으로 발사됐다./사진제공=인하대학교박물관

4년 뒤인 1958년 신설된 병기공학과와 원자력공학과('응용물리학과 원자력전공'으로 개설해 이듬해 '원자력공학과'로 개칭)는 지금 돌이켜보면 학교 및 정책 당국의 선견지명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6·25전쟁 때 북한군이 몰고 온 소련제 T-34 탱크 200대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뼈아픈 경험에서 나라를 지키려면 적에 맞서 싸울 만한 수준의 무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1957년 12월22일 조선일보는 '20일 국방부 당국에서 탐문한 바에 의하면 국방부와 문교 양 당국은 명년 4월 입학기를 기하여 인천에 있는 인하공과대학에 다른 대학교에 없는 원자력공학과 및 병기공학과 설정하기로 합의를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양과의 설치는 장차 예상되는 원자전에 대비하여 앞으로 국내에서도 원자력공학과를 설정하여 원자학을 연구하는 데 목적이 있으며 병기학도 전공하여 병기 생산 장려에 이바지하도록 되어있다 한다'고 보도했다.

병기공학부와 응용물리학부가 증설된 것은 국가 정책적 성격이 크다. 당시 육군참모총장과 공군참모총장은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은 공학부 증설 취지에 대한 의견서를 통해 '차제에 귀 대학에서 병기공학부 및 원자력공학부를 증설해 군사 화학의 발전 향상을 도모코저 함에 있어서 군은 한도 내의 협조를 아끼지 않을 것이며 오직 귀 대학의 발전과 번영이 있기를 희원하는 바입니다'라고 환영의 뜻을 밝혔다.

1958년 신설한 원자력공학과와 병기공학과는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K-원전과 K-방산 발전을 위한 씨앗인 셈이다. 지난해 하반기 들어 한국수력원자력과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등의 원전 설비 개선 사업 수주, 미래형 궤도 보병전투장갑차인 '레드백' 공급 등이 이어졌다.

하지만 병기공학과와 원자력공학과는 4·19와 5·16을 거치며 정치적 격랑 속에서 4년 만인 1962년 1월17일로 아쉽게 폐과되고 말았다.

1960년 로켓 발사를 주도한 병기공학과는 폐과됐지만 그 후 학내에 '우주과학연구회(로켓반)'가 발족돼 1964년 IITA-7CR, 1968년 IITA-X21 등을 성공적으로 발사하기에 이르렀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젊은 공학도들이 우주를 향한 꿈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연구개발에 앞장선 것은 인하공대의 자랑스러운 발자취이다.

▲ 1964년 12월19일 인하공대 로켓반이 개발한 3단 고체연료 로켓 IITA-7CR은 인천 소래포구 해변에서 발사돼 50㎞ 상공까지 다다랐으며, 그 모형이 인하대 캠퍼스에 설치돼 있다./사진제공=인하대학교
▲ 1964년 12월19일 인하공대 로켓반이 개발한 3단 고체연료 로켓 IITA-7CR은 인천 소래포구 해변에서 발사돼 50㎞ 상공까지 다다랐으며, 그 모형이 인하대 캠퍼스에 설치돼 있다./사진제공=인하대학교

인하공대 최상혁(기계 64학번)은 로켓반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며 1964년 12월19일 인천 소래포구 해변에서 3단 고체연료 로켓 IITA-7CR을 50㎞ 상공까지 쏘아 올리는 데 성공했다. 이후 3학년 때 로켓 연료를 제작하다 일어난 폭발 사고로 오른손을 잃었다. 그러나 꿈을 포기하지 않고 미국 오리건주립대에 건너가 기계공학 석사·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1980년 NASA에 입사했다. 나사 랭글리연구소에서 40년간 일하며 고등책임연구원을 지냈고 200편 이상의 논문 및 보고서와 60여개의 특허를 획득했다. 근무 중 나사 최고과학자상, 최고 기술이전상, 최고특허상 등 71개의 상을 수상했다. 2020년 5월에는 NASA '발명가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이후 나사의 항공우주 기술을 모국에 전수하기 위한 가교 역할을 하며 인하대와 랭글리연구소 간 우주개발협력서 협정을 체결하는 데도 기여했다.

민경주(고분자공학과 71학번)는 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 아크론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000년부터 한국항공우주연구원 나로우주센터장과 융합기술연구소 연구위원을 지내며 국산 우주 발사체 성공의 토대를 마련했다.

1968년 9월 조중훈 한진상사주식회사 사장이 인하학원을 인수했다. 1970년 9월 재단 이사회는 종합대학 개편안을 확정하고 문교부에 두 차례에 걸쳐 인하대학교 설립 인가 신청서를 제출했다.

1971년 12월31일 인하공대는 종합대학으로 승격 인가돼 '인하대학교'로 제2의 도약을 맞이하면서 공과대학에 항공 및 생물화학공학과가 증설돼 총 18개 학과를 두고, 이과대학과 경영대학을 신설했다. 또 1972년 12월26일에는 사범대학을 신설했고 1984년 10월5일에는 인천 지역 최초로 의과대학을 신설해 종합대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2023년 현재 공과대학, 자연과학대학, 경영대학, 사범대학, 사회과학대학, 문과대학, 의과대학, 미래융합대학, 예술체육대학, 국제학부, 소프트웨어융합대학, 프런티어학부대학 등 12개 단과대학에 1만7798의 학생이 재학 중이다(대학원 포함 2만1092명. 4월 1일 정보공시자료 기준).

인하대는 '조국부강, 공업입국'의 창학 이념에 부응하면서 시대마다 선진 대한민국의 토대를 다지고 발전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우수 인재를 배출해 왔다. 70년의 대학 역사 속에서 산업, 연구, 교육 현장에서 대한민국 발전에 기여한 20만 인하대 동문들의 미래를 향한 피땀 어린 노력은 현재 진행형이다.

▲ 황규화 전 동아일보 편집부장·전 채널A 심의실 부국장
▲ 황규화 전 동아일보 편집부장·전 채널A 심의실 부국장

/황규화 전 동아일보 편집부장·전 채널A 심의실 부국장

 


 

[인터뷰] 인하대 1회 졸업 남종우 명예교수 “출석 철저히 점검…평균 취업률 78%”

▲ 인하대 1회 졸업 남종우 명예교수.
▲ 인하대 1회 졸업 남종우 명예교수.

“미국 MIT와 같이 훌륭한 지도자 발명자가 되어 매일 경쟁하고 전진하여야 한다. 일본 사람에게 배운 것만이 제일로 여기는 것은 잘못이니 배우고 발명해 더욱 한인이 전진해 나가게 되길 축복한다.”

인하공과대학 1회 졸업생인 남종우(사진) 박사는 1954년 4월24일 대학 설립자로서 개교기념식에 참석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떠올리며 당시 대한뉴스(제46호)에 보도된 대통령 축사를 소개했다.

남 교수는 1958년 3월 화학공학과 졸업증서(101호)를 받았다. 그는 졸업 직후 모교 조교로 남아 1962년 전임교원이 됐다. 1999년까지 학생처장, 부총장, 의과대학설립추진위원장, 전산화추진위원장 등을 두루 거친 역사의 산 증인이다.

그는 “초창기 입학 전형에서는 고교 수석졸업 등 성적이 우수한 경우 필답고사가 면제됐고, 병기·원자력공학과 입학생은 4년 재학 중 병역 연기가 가능했다”고 회고했다. “전국 대학 중 유일하게 개근상 제도가 있었다”면서 “교수들의 출석 점검이 철저하게 이루어져 학사 자료에 따르면 평균 출석률이 98%를 넘어섰고, 국내 대학 중 처음으로 개설된 원자력공학과의 출석률은 100%였다”고 말했다.

그는 “전쟁 직후인 1950년대 초반의 대한민국 1인당 국민총소득은 60달러에 불과했다”며 “생산 공장도 거의 없었던 불모지와 같은 시대라서 대학을 나와도 전공 분야의 직장을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으나 1958년 3월 졸업한 6개 학과 1회 졸업생들의 취업률은 평균 78%로 높은 수준이었다”고 강조했다.

인하공대의 초창기 학사 관리는 매우 엄격해서 1학년 2개 과목에서 학점을 취득하지 못하면 퇴학을 당해 개교 이후 4년 동안 제적된 학생 비율은 매년 4~6%에 달했다고 한다. 남 교수는 “2학년 진급 시 학점 미취득 제적학생 일부는 서울 모 대학의 2학년으로 편입해 정상 졸업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교내 인경호 주변에 세워졌던 설립자 이승만 박사 동상이 1983년 10월 끌어내려진 후 복원됐으나 1984년 11월 다시 일부 민주화운동 세력에 의해 강제 철거되고 아직 복원되지 못해 안타깝다”면서 “이 박사 동상은 정치가가 아닌 대학 설립자로서 세워진 것이 명명백백하다”고 말했다.

“자책감이 큰 선배 동문들은 물론 결자해지의 입장에서 이 박사 동상이 원상 복원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김형수 주필 khs@incheonilbo.com

/인하대학교 총동창회·인천일보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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