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자체는 부지 제공…시민·기업은 성금 모아

이승만 대통령, 인천에 공대 설치 지시
인천시, 1954년 용현·학익동 시유지 기부
12만5173평 당시 감정가 1712만여환

교사·도서관 등 건축 부지 2만5000평
이주·농작물 보상 비용 230만환 필요

인천시 '부지조성위' 띄워 적극적 모금
동·출장소로 공무원 보내 기부금 징수
▲ 인하대 본관 건물 전경. /사진제공=인하대학교
▲ 인하대 본관 건물 전경. /사진제공=인하대학교

1954년 4월24일 개교한 인하공과대학은 두 가지의 역사적 사명을 부여받고 출범했다.

첫째, 인하공대는 일제 치하 해외 독립운동의 중심기지 역할을 한 하와이의 이민 50주년 기념사업으로 출발했다. 특히 우남 이승만 박사가 직접 운영했던 하와이 한인기독학원 매각 대금 15만 달러가 대학 설립의 종잣돈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더욱 크다.

둘째, 인하공대는 한국전쟁으로 피폐화된 산업 시설을 재건하고 향후의 공업 발전을 선도할 젊은 과학 기술자 육성이 목표였다. 36년간의 식민 통치와 3년간의 전쟁에서 입은 깊은 상흔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빠르게 공업화를 실현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공업대학의 설립은 당시 가장 시급했던 국가적 과제였다.

이와 같이 인하공대가 지닌 민족대학으로서의 정체성과 시대정신은 현재까지도 인하대학의 숭고한 건학 이념으로 계승되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인하대학교의 교명이 '인천'과 '하와이' 첫 글자의 합성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대학 구성원과 졸업생들이 국가와 지역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해 왔음을 인식한다. 하지만 인하공과대학이 왜 하필 인천에 설립되었는지, 또 대학 설립 과정에서 인천시민과 지역사회는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지 등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내용이 부족하다.

한국전쟁 이후 공업대학의 설립이 구상되던 초기 단계에서 처음 모색된 대학 부지는 영등포 등 서울 외곽 지역으로 알려진다. 따라서 대학 이름도 한국과 하와이를 뜻하는 '한하공과대학'이 거론됐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곧바로 인천으로 바뀌었다. 인천은 이 대통령이 각별한 인연을 맺은 곳이다. 하와이로 최초의 이민선이 출발한 항구이며, 또 이 대통령 자신을 포함해 '50년 전 애국지사들이 비장한 결심을 가지고 떠났던 장소'이기 때문이다. 당시 표양문 인천시장은 이 대통령의 의중을 파악하고 용현·학익동 일대에 보유하고 있던 시유지를 대학 부지로 활용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사실 용현·학익동 일대의 시유지는 과거 일제에 의해 추진된 시가지계획으로 확보된 땅이었다. 1938년 조선총독부가 토지구획정리사업의 효율성과 속도를 높이기 위해 '시가지계획령' 일부를 개정하여 공업용지와 주택지 조성사업을 동시에 할 수 있도록 정비했다. 이에 따라 이듬해부터 용현·학익동 일대 70여만 평에 대규모 공장과 종업원 사택들이 연이어 들어섰다.

▲ 일지출∙학익공업용지 및 주택지조성공사계획 평면도. /출처=국가기록원

'일지출·학익(日之出 鶴翼)공업용지 및 주택지조성공사계획 평면도'를 보면 현재 미추홀구 용현동과 문학동을 잇는 '소성로'를 기준으로 남쪽에 히타치제작소, 오타후쿠와타, 일선염공, 일본농약, 조선중앙전기, 제국제마 등과 같은 대형 공업 시설이 입지하고, 북쪽에는 공원, 학교, 주택 등이 들어서는 신시가지 조성이 계획된 지역이다. 일제가 폭등하는 지가 상승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강제수용령을 발표하면서까지 확보한 땅이다. 하지만 아시아태평양전쟁이 격화되면서 개발이 중단되고, 해방 후 귀속 재산 처리 과정을 통해 인천시에 그대로 인계됐다. 1950년경 미군 항공기에 의해 촬영된 일대 사진을 참고하면 남쪽의 공업 단지를 제외하고 북쪽의 주택용지는 인하공과대학이 설립되는 1954년까지 별다른 개발사업 없이 경작지 그대로 이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일제 말에 설립된 공장 시설들이 전쟁 후에도 그대로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에 공업대학을 세우기 위한 최적의 환경을 갖춘 곳으로 판단됐다.

▲ 1950년경 용현동 일대에는 바다를 접한 공장들이 가동되고 있었다./사진제공=인하대박물관
▲ 1950년경 용현동 일대에는 바다를 접한 공장들이 가동되고 있었다. /사진제공=인하대박물관

이 대통령은 표 시장을 동반하고 학교 부지를 시찰하면서 부지 규모를 현재의 학익사거리 일대까지 확대하도록 지시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신설 공과대학의 규모가 그렇게까지 클 필요는 없다고 판단되었는지 최종적으로는 12만5173평(대지 6180평, 임야 2만4455평, 전 6만8441평, 답 2만6097평)을 인천시로부터 기부 받는 것으로 결정됐다. 이 토지는 국무회의 논의와 1954년 2월1일에 개최된 인천시의회 의결을 거쳐 '인하공대설립기성위원회'에 기부됐다. 기부 당시 감정가는 1712만8550환이었다.

▲ 1954년 인하공대 개교 당시 대학(현재 인하공업전문대학교) 주변은 농경작지가 대부분을 차지했다./사진제공=인하대박물관
▲ 1954년 인하공대 개교 당시 대학(현재 인하공업전문대학교) 주변은 농경작지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사진제공=인하대박물관

한편 인천시는 단순히 시유지를 인하공대 측에 기부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기부 부지가 시유지라고 하더라도 그곳에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주민들의 이주비나 경작물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했다. 당장 기계공학관 등의 여러 교사와 도서관, 대강당, 학생회관, 교수 사택 등이 입지해야 할 건축 부지 2만5000평의 보상비만 해도 230만환의 자금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인천시민과 기업체 등으로 구성된 '인하공대부지조성위원회'가 조직되고 활발한 모금운동이 펼쳐졌다. 중앙에서는 설립기성위원회가 전 국민을 대상으로 성금 모금에 나서고, 인천에서는 부지조성위원회가 인천시민을 대상으로 또 다른 성금 모집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국가기록원에는 1955년 인천시 내무국 총무과에서 생산한 인하공대부지조성(관리번호 : BA0024413) 서류철이 보존되어 있다. 이는 인하공대부지조성위원회의 활동 내역을 알려주는 유일한 자료로 추정된다. 여기에는 시민 성금을 보관한 부시장 명의의 특별당좌예금통장을 비롯하여 부지조성위원회의 각종 지출 결의서와 수입 결의서 등 회계 장부들이 정리돼 있다. 1955년 3월부터 11월까지의 서류여서 전체 성금 모집운동의 규모를 파악하기엔 한계가 있으나 대략적인 조직 규모와 활동은 파악할 수 있다.

지출 결의서에는 인천시 관할의 각 동과 출장소 등으로 추진위원이 직접 출장을 나가 기부를 독려하고 기부금을 징수해온 사항이 기록돼 있으며, 교통비 등의 여비 증명서가 첨부됐다. 또 수입 결의서에는 각 동장과 출장소장이 시민들로부터 모금한 액수를 기입한 납부서가 첨부됐다. 총 70건의 납부서에 수록된 모금 총액은 44만8430환이다. 가장 많은 부지 기금을 납부한 기관은 부평출장소로 전체금액의 35%를 차지하는 15만5624환이다. 다음으로 도원동 3만7000환, 경·용동 3만4594환, 송현1동 2만9410환, 율목동 2만1365환 등의 순이다. 이를 통해 부지조성위원회는 철저히 공무원 조직을 중심으로 활동한 단체임을 알 수 있다. 각 동별로 할당금이 지정된 것 같으나 문서의 시기가 짧고, 또 기부금 규모도 천차만별이어서 이를 전체적으로 파악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 1959년 2월 인하공대 본관(기초공학관) 건축공사에는 미군 공병대의 중장비가 지원됐다. /사진제공=인하대박물관
▲ 1959년 2월 인하공대 본관(기초공학관) 건축공사에는 미군 공병대의 중장비가 지원됐다. /사진제공=인하대박물관

인하공과대학의 설립과 운영을 위해 원래 계획된 재원은 총 515만 달러(3억903만환)에 달했으나 실제로 개교 당시에 모금된 재원은 30% 정도의 9600만환밖에 되지 않았다. 이는 당초 기대했던 미국 등에서의 원조 자금이 거의 들어오지 않았고, 또 기업체 등의 민간 기부금 조성도 저조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비록 소액이라도 많은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기부운동을 펼칠 것을 강조했지만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은 많지 않았다.

우선 공무원들의 봉급에서 5%씩 갹출하는 모금활동도 진행됐다. 결국 이는 5·16 쿠데타 이후 대학과 재단 관계자들이 군부에 끌려가 고초를 당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부지조성위원회의 성금 모집운동 역시 강제성이 있을 수 있겠으나, 인하공대의 설립으로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주민들에 대한 원조적 성격을 포함하는 모금운동이란 점에서 그 성격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시민 성금으로 마련된 2만5000평 외의 학교 부지 10만평에 대한 보상금은 인하공대 측에서 순차적으로 해결하여 1960년에서야 모두 마쳤다. 다만 800세대에 이르는 피난민촌에 대한 이주 협상이 결렬되어 결국 강제 철거에 이르게 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인하공과대학이 인천에 설립된 경위는 하와이 이민과 관련된 인천의 역사성,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의 강한 의지에 따른 것이지만 그와 함께 인천시와 인천시민의 열렬한 지원이 있었다. 인하공대를 계승하여 종합대학으로 성장한 인하대학교 역시 이러한 지역사회와의 깊은 인연을 잊지 말고 인천의 성장과 발전을 함께 고민하며 더 긴밀히 상생해 나가야 할 시기이다.

▲ 류창호 인하대박물관 학예사

/류창호 인하대박물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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