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물밀물

재외동포청 인천 출범과 함께 새삼 주목을 받는 곳이 있다. 바로 한국이민사박물관이다. 하와이 이민 100주년을 맞아 선조들의 개척자적 삶을 기리고 그 발자취를 후손들에게 전하자는 취지로 탄탄한 준비를 거쳐 2008년 6월 완공했다. 인천시민과 해외동포들이 뜻을 모아 세운 국내 최초의 이민사박물관이다. 우리나라 첫 공식 이민의 출발지였던 인천에 건립함으로써 100년 넘은 한인 이민역사를 체계화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했다. 한국의 재외동포는 193여개국 730만여명에 이른다.

한국이민사박물관은(중구 월미로 329)은 월미공원 자락에 고즈넉히 자리를 잡고 있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그 옛날 이민단이 하와이로 가는 험한 길을 떠올린다. 이민단은 우선 일본 나가사키행 겐카이마루 기선에 올라야 했는데, 1902년은 인천 축항을 만들기도 전이다. 낮은 수심 등으로 인해 배를 제물포 해안가에 댈 수 없자, 먼저 잔교에서 나룻배를 타고 월미도 인근까지 가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갤릭호에 탄 102명의 이민단은 마침내 1903년 1월1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시작된 이민 생활은 만만하지 않았다.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새벽 4시쯤부터 10시간 동안 농장일에 매진했다고 알려진다. 당시 월급으로 성인 남자 기준 15~17달러를 받았는데, 필요경비를 제외하고 매달 1달러 이상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았다고 한다.

한국이민사박물관은 지난 6월10일 재외동포청 인천 출범을 기념해 한인 이민 발자취와 인천 근현대사를 살펴보는 도보 답사 프로그램을 마련하기도 했다. '한민족 첫 공식 이민, 포와(布哇)로 가는 길'이었다. '포와'란 개화기 때 중국과 일본이 하와이(Hawaii)를 표기한 한자어다.

재외동포청은 재외동포들의 권익을 보호·지원함은 물론 이들과 모국 간 교류 협력을 촉진하는 연결고리 역할을 수행한다. 그만큼 이들의 뿌리 '이민'을 주제로 한 한국이민사박물관의 중요성도 커졌다. 그래서 박물관의 시설 확충과 내용 혁신 등이 절실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그러지 않아도 그동안 박물관 안팎에선 '더 다양한 유물을 수집해야 하지 않나' 등의 개선 목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한국이민사박물관은 재외 국민의 안식처로 등장할 수 있는 '마음의 고향'이다. 아울러 한국인의 문화 전반을 아우를 수 있는 향수를 간직한 곳이다. 재외동포청을 유치한 만큼, 부족한 박물관의 콘텐츠를 늘려 바야흐로 세계로 뻗어나간 우리 민족의 얼을 알리는 기념비적 장소로 떠올랐으면 싶다. 동포들의 삶과 애환이 살아 숨 쉬는 박물관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 이문일 논설위원.
▲ 이문일 논설위원.

/이문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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