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근대와 현대의 파수꾼
③ 개항의 거인들(下)
▲ 1905년 을사늑약 후 유완무는 가족과 함께 만주로 망명한다. 이곳에서 유완무는 이상설과 이동녕, 이시영 등과 함께 연변 용정촌에 서전서숙 설립에 나섰다. 서전서숙은 국외에 세워진 최초의 민족 사립 학교로 북간도, 서간도, 연해주 등 지역에서 일제 식민 교육에 맞서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사진제공=한국학중앙연구원
▲ 1905년 을사늑약 후 유완무는 가족과 함께 만주로 망명한다. 이곳에서 유완무는 이상설과 이동녕, 이시영 등과 함께 연변 용정촌에 서전서숙 설립에 나섰다. 서전서숙은 국외에 세워진 최초의 민족 사립 학교로 북간도, 서간도, 연해주 등 지역에서 일제 식민 교육에 맞서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사진제공=한국학중앙연구원

 

개항 인천은 신문물 유입이란 파고 속에 사그라지는 ‘조국’의 한이 타 지역보다 강했다. 그만큼 독립을 향한 개항 도시 인천의 의지는 드높았고, 그 불씨가 김구의 인천감리 투옥으로 타올랐다. 그렇게 청년 김창수(후일 김구)는 부평 시시내 유씨 집안과 인연을 맺었고, 그 가운데 유완무는 간도에서 독립의 혼불이 됐다. 김정곤은 인천항 부두노동자의 대표격이었다. 약 40년 이상 항 노동자를 이끌었던 김정곤은 친일과 노동운동, 지역 계몽활동 사이에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답동성당을 탄생시킨 니콜라 빌렘 신부는 안중근 의사의 영적 안식을 도왔다.

 

부평 시시내 유씨. 그리고 유완무

김구 선생 '큰 형'으로 따라

만주 '서전서숙' 설립 주역

▲ 유완무 족보.
▲ 유완무 족보.

유완무(柳完茂, 이하는 유완무로 통일한다, 1861∼1909)는 유인무(寅茂), 인무(仁戊), 유안무(柳安茂), 유완무(完懋)라 불린다.

이훈익의 <인천지지(仁川地誌)> 중 ‘지사(志士) 류인무(柳寅茂)’에서는 “류인무(柳寅茂)는 1861년(철종 12년) 부평부 시천군 명문가에서 태어났다”라고 했다. 유완무와 백범 김구 사연은 유명하다. 김창수에서 김구로 개명하게 된 이유와 독립의식 고취를 위한 유완무와 김구의 인간 관계, 김구와 시시내 유씨 집안 인연 등은 다시 읽어도 가슴을 뜨겁게 한다. 유완무와 김구(1976∼1949)는 15살 차이이다. 김구가 유완무를 동지이기 앞서 ‘큰 형’으로 따른데는 유완무의 ‘독립’에 대한 실천적 의지가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유완무는 부평에서 전북 무주로 이사갔고, 1905년 을사늑약 때 가족이 모두 만주로 이주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양한 구국운동에 참여했다. 간헐적 기록밖에 남지 않은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우당 이회영과의 관계를 알 수 있다. <우당 이회영 약전>에는 “이동녕, 여준(呂準), 장유순(張裕淳), 유완무(柳完懋) 등과 협의하여 선정한 지역은 본국과의 거리, 교포의 규모와 정착상황 그리고 러시아와의 거리 등을 참작하여 용정촌을 근거지로 결정할 만큼 일찍부터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계획을 세워나갔다”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유완무는 당시의 노선 투쟁의 희생양으로 피살됐다. 일제 훈춘 경무국의 기록인 만큼 걸려 믿거나,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다. 1909년 2월24일 저녁 이범석의 사주로 그가 사망한 사실은 ‘관업신문’ 1912년 8월25일과 같은해 11월17일을 통해 확인된다. 그리고 1913년 11월20일 이 신문은 “훈춘 신풍학교 학생 일동이 유완무가 암살된 곳인 훈춘 홍치허를 찾아 조례를 표하고 통곡한 뒤 그곳에 정동학교를 세웠다”고 했다. 만주 일대 북간도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일대에 유완무의 인지도를 새삼 깨우칠 수 있다.

진주 유씨 족보를 통해 유완무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유완무의 자는 중일이고, 호는 백초이다. 1905년 전가족을 만주로 이주시킨다. 서전서숙 설립에 노력하고 러시아 및 청나라 영역에서 항일독립투쟁에 전력한다. 족보에 따르면 그가 중화민국 길림성 훈춘현 흑정에 묻혔고, 그의 부인 심씨 묘는 1902년 사망 후 무주군 무풍면 현내리 완촌에 있다.

유완무의 자 희달은 1891년생, 희영은 1895년이고, 손자 동규는 1928년에 태어났다. 유완무는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지만, 그의 자손을 찾을 수 없어 방치돼 있다. 유완무의 자손은 분명 훈춘 어딘가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시시내 유씨 집안에는 서예 거두 유희강이 있고, 근대문학을 이끌었던 유희진이 있다.

유희진의 저서 <건국교 유교>의 권두 백범 김구 선생의 축하휘호가 수록됐다. 유희강 중국 유학길에 백범이 나섰다는 ‘와전’에도 불구하고, 시시내 유씨와 백범의 긴밀한 관계는 후세 인천 사람에게 귀감이 된다.

 

개항의 노동 대부, 김정곤

인천항 부두 노동자 거목

일제 부역 공훈록 '민낯'

▲ 김정곤은 19C말부터 영신조를 이끌었다. 사진은 1935년 6월 일본인이 세운 인천곡물협회에 맞서 영신조 사옥 앞에서 파업 중인 노동자의 모습이다./사진제공=인천일보DB
▲ 김정곤은 19C말부터 영신조를 이끌었다. 사진은 1935년 6월 일본인이 세운 인천곡물협회에 맞서 영신조 사옥 앞에서 파업 중인 노동자의 모습이다. /사진제공=인천일보DB

 

서상집이 개항기 수면 위의 거두였다면, 김정곤은 개항기 부두 노동자의 거목이었다. 당시 거두와 거목이 모두 ‘변절’을 했던 것처럼, 그의 행적이 썩 자랑스럽지는 않다.

김정곤(金貞坤, ?∼1949)은 개항을 지나 일제강점기 인천항 노동운동 때마다 거론된다.

1898년 응신청 영신조 조합장에 올라 1910년까지 10여년을 인천 부두 노동자를 이끈 김정곤. 그의 궤적은 노동조합 수장으로서와 인천 교육 운동으로 대표된다. 그리고 인천항 노조를 이끌며 일제에 부역했던 삶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김정곤이 응신청 최고지위인 검찰로 활동 당시 백범 김구와 인연을 맺었고, 이를 <백범일지>에서 소개하고 있지만 김정곤을 인천감리서 경찰로 오해했다.

김정곤은 러일전쟁 직후 일본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일한협동전운사 부사장으로 활동하며 인천항 군수품 육상 운송 등에 필요한 인천인근 각 군의 촌민 4000여명을 모아 밤낮으로 감독해 일본군의 군수품을 운반했으며 응신청 소속 인부를 참여시켜 일본군을 적극 도왔다”며 일제 공훈록은 기록한다.

인천신상협회에도 이름을 올린 김정곤은 짚신을 신고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삼줄기를 꼬아 만든 삼신을 팔아 돈을 벌었고, 러일전쟁 때 인천 앞바다에서 자폭한 러시아 군함을 인양해 10만원이 넘는 거금을 보상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1933년, 개항 50주년을 기념해 그는 인천부윤으로부터 인천발전공로자 30명에 선정돼 표창을 받았다.

그러나 김정곤은 1909년 공금 횡령으로 조사를 받았고, 1920년에는 위조지폐 문제로 체포됐다.

황성신문과 제국신문, 중외일보 등을 통해 김정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 김정곤 관련 자료. /인천일보DB
▲ 김정곤 관련 자료. /인천일보DB

김정곤은 1918년 12월 장례를 치를 돈이 없는 유족에게 의연금을 모아주고, 1925년 4월에는 인천기근구제회 회원으로 활동하는 등 기부활동을 펼친다. 1928년에는 임금인하에 반발해 노동자 대표로 파업에 돌입했다.

김정곤은 1903년 6월 세워진 인천 최초 민간인 경영 제녕학교(濟寧學校) 설립에 일조했고, 인흥학교와 인명학교, 인천항사립소학교 운영에도 깊이 관여했다. 여기에 1904년에는 무료 접종을 위해 팔을 걷었다.

김정곤은 백범 김구가 인천을 방문하기 2주 전 투명 중 사망한다. 그가 백범 김구에서 탈옥에 일조했다는 사실을 알렸고, 이 내용은 <백범일지>에 실려 있다.

 

 

빌렘 신부, 답동성당과 안중근

제물포성당 건립 백방 활약

안중근 고해성사 받은 신부

▲ 니콜라 빌렘 신부. 한국에서는 홍석구 요셉 신부.
▲ 니콜라 빌렘 신부. 한국에서는 홍석구 요셉 신부.

니콜라 조제프 마리 빌렘(Nicolas Joseph Marie Willhelm, 1860∼1938) 신부는 니콜라 빌렘이라 통용된다. 한국에서는 홍석구 요셉 신부로 활동했다.

그의 고향은 프랑스 알자스-로렌 스피슈른·슈피헤른이다. 학창시절 배운 ‘마지막 수업’의 배경이 된 바로 알자스-로렌이 그가 태어난 곳이다. 프랑스에서 태어났지만, 독일 국민이 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이었다. 어찌보면 그가 사제서품 후 한국에서 포교활동을 한 것은 운명이었다.

‘인천’이 빌렘 신부를 기억하는 것은 두 가지다. 그가 당시 제물포성당(현 답동성당)의 바탕을 깔았던 초대 신부였고, 당시 황해도 근방에서 사목활동을 하며 안중근과의 관계를 통해 인천과 연계가 깊었던 황해도 천주교 역사를 되짚을 수있기 때문이다.

황해도에서의 동학농민운동 당시 김구와 안중근 부친인 안태훈은 관계를 맺었고, 둘 사이는 오해와 이해가 이어지며 더욱 긴밀해졌다. 그런 와중에 안중근의 1909년 이토히로부미 저격은 동아시아의 일대 ‘사건’이었고, 그 한가운데 빌렘 신부가 있었다. 그리고 김구는 이 사건으로 고초를 겪는다.

홍석구 신부에 의한 제물포성당 설립은 1889년 7월1일로 거스른다. 약 1년간 제물포성당 건립을 위해 백방으로 활약한 홍 신부는 이듬해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로 옮긴다. 홍 신부와 안중근은 1897년 즈음 인연을 맺었고, 1906년 안 의사 집안이 중국으로 이전하며 인연이 잠시 끊겼다. 그리고 1909년 안 의사의 의거 소식을 뒤늦게 접하고 마지막까지 안 의사의 영적 교리를 지켜내려 애썼다. 그 와중에 친일의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와 마찰을 빚었다. 만일 홍 신부가 뮈텔 주교의 강권에 무릎을 꿇고 뤼순을 가지 않았다면, 일제강점기 천주교회의 친일 만행은 두고두고 큰 비판을 받았을거다. 인천은 개항기 답동성당 건설에 홍 신부에게 빚을 졌고, 조국은 안 의사를 마지막까지 감싼 홍 신부를 기억하고 있다.

/이주영 기자 leejy96@incheonilbo.com



관련기사
[개항 140년 다시 깨어나는 인천] ③인천을 주요 무대로 한 획…개항 격변기 속 '세 인물' 개항은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에 강력한 한방이었다. 부산, 원산보다 제물포 개항은 조선의 근간을 흔들었다. 1883년 개항시대, '제물포'에는 여러 군상이 태어나고 활개 쳤으며 친일의 흔적을 남기며 사라졌다.'개항 140년, 다시 깨어나는 인천' 3편에서는 19세기 말, 20세기 초를 거치며 인천을 주요 무대로 획을 그은 인천감리 하상기와 거부 서상집을 다뤘다. 하상기는 김란사의 남편으로 알려졌지만, 약 10년간의 인천 인연은 대단하다. 그리고 일본·미국과 하상기 관계 속 고종의 밀명을 받았을 하상기는 [개항 140년 다시 깨어나는 인천] ③개항의 거인들 뒤죽박죽 역사 (上) 해방이 도둑처럼 왔다. 그럼 개항은 강도처럼 왔을까.제물포 개항은 끊임없는 일본과의 투쟁이었다. 조선 잠식을 위해 제물포를 뺏겠다는 일본에 맞서 조선은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그들의 총칼 앞에 무력했다. 1883년 1월1일 제물포 개항, 세상에 ‘제물포-인천’을 알린 역사적 사건이었지만, 그로부터 ‘제물포-인천’의 소일본화는 빠르게 이뤄졌다.제물포를 거쳐 간 개항의 인물은 거대했다. 마지막까지 구국을 위해 몸부림쳤던 ‘하상기’와 개항의 거상 ‘서상집’ 그리고 노동현장의 정점 ‘김정곤’, 이주 역사의 이정표 ‘이응호’, 안중근 의사의 버 [개항 140년 다시 깨어나는 인천] ②1883년 밀물처럼 들어왔다 1945년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정확히 20년 전의 산골 사람은 개화를 맞이하였고 멧돼지 목에 하이칼라를 달아놓은 듯한 모습이 바로 20년이 흐른 지금의 인천의 모습이다.”식민 도시 '인천'을 표현한 일본의 비유이다. 1883년 개항 후 인천으로 밀려든 일본, 해가 다르게 변하며 소일본화되는 인천을 바라보며 경박한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던 그들은 인천을 빠르게 잠식했다. 자기네 땅이라 선 긋고, 민중을 내쫓으며 개항장 제물포에 일본 풍경을 덧씌웠다. 개항 후 외교권이 침탈되기 전 인천은 국제도시였다. 동북아 최고의 미항이라 불렸다. 그러나 국권마저 [개항 140년, 다시 깨어나는 인천] ①대한민국 역사 갈림길에서 도약 지름길로 이미 백 년 전 인천은 홍콩, 요코하마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코스모폴리탄이었다. 개항부터 일제강점기 전까지 부산이 넘볼 수 없는 한반도 제1의 항구 인천은 모든 게 통했다. 찢기듯 개항됐지만, 그로써 인천은 지금에 서게 됐다. 인천은 1883년 개항 1기를 맞았고, 2023년 개항 2기를 걷게 됐다. 140년 전 외세가 인천을 열었다면, 이젠 우리 손으로 인천을 더 너른 곳으로 도약시키려 한다. 개항 140년 인천, 창간 35년 인천일보. 두 '인천' 공동체가 벗 삼아 과거와 현재의 '인천'을 좇아, 미 [개항 140년 다시 깨어나는 인천] ④항구가 열리며 바다에 빗장이 세워지고 - 개항과 해관 인천이 갈수록 쪼그라진 이유는 분명하다. 바다 인천을 등한시했기 때문이다.외세의 침탈 목적으로 인천이 열렸지만, 그때부터 줄곳 인천은 1등 도시를 놓치지 않았다. 1883년 1월1일 행정상 개항은 의미가 없다. 실질 개항은 '인천해관'이 설치된 6월16일 즈음이다. 개항은 모든 걸 바꿨다. 특히 중세에서 근대로, 근대에서 현대로 가는 길목에 '인천해관'이 버티고 서며 파수꾼 역할을 했다.부산과 원산에 이어 세 번째로 인천이 개항됐지만, 조선의 실질 개항은 인천이 문호를 열 때부터 시작된다. 3곳 중 가장 [개항 140년 다시 깨어나는 인천] ④항구가 열리며... 개항과 해관바다 길목에 '인천해관' 위풍당당 오는 6월16일은 인천해관 창립 140주년이 되는 날이다.인천은 부산, 원산보다 개항이 늦었지만, 첫 해관이 설치됐다. 그때부터 전국 1위 도시로 성큼 올랐다. 행정 수도 한성은 사람이 오갔을 뿐, 실질적 문물이 교차하는 공간은 인천이었다. 바다가 열린 인천의 길목에 인천해관이라는 빗장이 세워졌다.▶관련기사: [개항 140년 다시 깨어나는 인천] ④항구가 열리며 바다에 빗장이 세워지고 - 개항과 해관인천해관은 어마어마했다. 1903년 인도된 양무호로 조선은 휘청였다. 한 나라 예산의 10%, 국방 예산의 30%를 여기에 쏟았다. 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