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근대와 현대의 파수꾼] ①조선의 심장지대 (프롤로그)

1883년 외세에 의해 문 열린 항구
2023년 '개항 2기' 더 너른 곳으로

이미 백 년 전 인천은 홍콩, 요코하마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코스모폴리탄이었다. 개항부터 일제강점기 전까지 부산이 넘볼 수 없는 한반도 제1의 항구 인천은 모든 게 통했다. 찢기듯 개항됐지만, 그로써 인천은 지금에 서게 됐다. 인천은 1883년 개항 1기를 맞았고, 2023년 개항 2기를 걷게 됐다. 140년 전 외세가 인천을 열었다면, 이젠 우리 손으로 인천을 더 너른 곳으로 도약시키려 한다. 개항 140년 인천, 창간 35년 인천일보. 두 '인천' 공동체가 벗 삼아 과거와 현재의 '인천'을 좇아, 미래로 향할 '인천'을 그려본다.

▲ 1884년 제물포 전경.

조용한 아침의 나라의 '상품을 건네는 항구'로 외세에 알려진 제물포(濟物浦), 그리고 '조선의 심장 지대'라 칭하던 곳은 해방을 맞아 '부끄럼 많은 보석장사아가씨'로 표현됐다.

개항 140년을 맞은 올해, 인천은 조용하다. 인천은 빗장이 뜯겨나가며 밀물처럼 들이닥친 열강의 틈새에서 겨우 숨이 붙어 있던 조국의 운명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한반도 근대가 인천을 통해 시작됐다. 그리고 현대의 시작점이 될 1945년 독립과 1950년 6·25 전쟁을 겪으며 인천은 다시금 거듭났다. 풍전등화 같은 한반도 운명이 인천을 통해 겨우 명맥을 유지하게 됐다. 근대와 현대의 갈림길에 '인천'이 서 있다.

1883년 1월1일 인천은 개항했다. 1876년 부산, 1880년 원산에 이어 세 번째 '조약개항장'이다. '인천'일 수밖에 없던, 개항의 운명. 여전히 1883년 1월1일 개항은 의문투성이다. 아직 개항의 근거는 흐릿하다. 왜 개항을 불과 3일 앞둔 1882년 12월28일이 돼서야 '제물포를 개항한다'는 포고가 조선이 아닌 일본에 내걸렸을까.

몸부림치던 조선의 저항 때문으로 해석되지만, 인천 개항일은 요식적 개항일인 1월1일부터 실질적 개항일로 6월4일, 6월16일, 9월19일까지 다양하다. 제1의 인천 개항이 외세로부터 시작됐다면, 140년이 된 올해 제2의 개항은 반드시 우리 손으로 일궈야 한다. “현 인천 발전은 개항을 토대로 해방 후 인천 시민이 성취한 것”이란 인식에서 “개항 140년을 돌아보고 성찰하자. 이제 제2 개항의 각오를 시작해야 한다”는 문제로 확대해야 할 때다.

인천 개항처럼 여러 인천 기관에도 기록이 갖는 오류가 있다. 대한민국 법원의 효시인 '인천'은 스스로 역사를 뒷걸음질 치는 일이 발생한다. 여기에 근대 교육의 시작인 '인천'에서 같은 일이 반복된다.

▶관련기사: [개항 140년, 다시 깨어나는 인천]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 그곳엔 인천 있었다

/이주영 기자 leejy96@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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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140년, 다시 깨어나는 인천] ①격동의 한국 근현대사, 그곳엔 인천 있었다 '왜 인천일까'. 대한민국 근대의 기준은 '개항'이다. 근대를 지나 현대의 변곡점은 광복과 한국전쟁이다. 근·현대를 고스란히 안고 사는 곳, 우리의 터전 '인천'이다. 조선,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을 거치며 '인천'을 빼놓고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오를 수 없다.인천의 개항으로 조선은 빠르게 근대로 흡수됐다. 조선을 강제로 병합한 일제는 인천 '일본화'에 나섰지만, 끝까지 저항하는 인천의 몸부림에 미완의 성공으로 그쳐 패망과 함께 철수했다. 그리고 6·25 [개항 140년 다시 깨어나는 인천] ②1883년 밀물처럼 들어왔다 1945년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정확히 20년 전의 산골 사람은 개화를 맞이하였고 멧돼지 목에 하이칼라를 달아놓은 듯한 모습이 바로 20년이 흐른 지금의 인천의 모습이다.”식민 도시 '인천'을 표현한 일본의 비유이다. 1883년 개항 후 인천으로 밀려든 일본, 해가 다르게 변하며 소일본화되는 인천을 바라보며 경박한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던 그들은 인천을 빠르게 잠식했다. 자기네 땅이라 선 긋고, 민중을 내쫓으며 개항장 제물포에 일본 풍경을 덧씌웠다. 개항 후 외교권이 침탈되기 전 인천은 국제도시였다. 동북아 최고의 미항이라 불렸다. 그러나 국권마저 [개항 140년 다시 깨어나는 인천] ③개항의 거인들 뒤죽박죽 역사 (上) 해방이 도둑처럼 왔다. 그럼 개항은 강도처럼 왔을까.제물포 개항은 끊임없는 일본과의 투쟁이었다. 조선 잠식을 위해 제물포를 뺏겠다는 일본에 맞서 조선은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그들의 총칼 앞에 무력했다. 1883년 1월1일 제물포 개항, 세상에 ‘제물포-인천’을 알린 역사적 사건이었지만, 그로부터 ‘제물포-인천’의 소일본화는 빠르게 이뤄졌다.제물포를 거쳐 간 개항의 인물은 거대했다. 마지막까지 구국을 위해 몸부림쳤던 ‘하상기’와 개항의 거상 ‘서상집’ 그리고 노동현장의 정점 ‘김정곤’, 이주 역사의 이정표 ‘이응호’, 안중근 의사의 버 [개항 140년 다시 깨어나는 인천] ③인천을 주요 무대로 한 획…개항 격변기 속 '세 인물' 개항은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에 강력한 한방이었다. 부산, 원산보다 제물포 개항은 조선의 근간을 흔들었다. 1883년 개항시대, '제물포'에는 여러 군상이 태어나고 활개 쳤으며 친일의 흔적을 남기며 사라졌다.'개항 140년, 다시 깨어나는 인천' 3편에서는 19세기 말, 20세기 초를 거치며 인천을 주요 무대로 획을 그은 인천감리 하상기와 거부 서상집을 다뤘다. 하상기는 김란사의 남편으로 알려졌지만, 약 10년간의 인천 인연은 대단하다. 그리고 일본·미국과 하상기 관계 속 고종의 밀명을 받았을 하상기는 [개항 140년 다시 깨어나는 인천] ③독립 운동·한국 포교 헌신…그러나 친일 부역도 있었다 개항 인천은 신문물 유입이란 파고 속에 사그라지는 ‘조국’의 한이 타 지역보다 강했다. 그만큼 독립을 향한 개항 도시 인천의 의지는 드높았고, 그 불씨가 김구의 인천감리 투옥으로 타올랐다. 그렇게 청년 김창수(후일 김구)는 부평 시시내 유씨 집안과 인연을 맺었고, 그 가운데 유완무는 간도에서 독립의 혼불이 됐다. 김정곤은 인천항 부두노동자의 대표격이었다. 약 40년 이상 항 노동자를 이끌었던 김정곤은 친일과 노동운동, 지역 계몽활동 사이에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답동성당을 탄생시킨 니콜라 빌렘 신부는 안중근 의사의 영적 안식 [개항 140년 다시 깨어나는 인천] ④항구가 열리며 바다에 빗장이 세워지고 - 개항과 해관 인천이 갈수록 쪼그라진 이유는 분명하다. 바다 인천을 등한시했기 때문이다.외세의 침탈 목적으로 인천이 열렸지만, 그때부터 줄곳 인천은 1등 도시를 놓치지 않았다. 1883년 1월1일 행정상 개항은 의미가 없다. 실질 개항은 '인천해관'이 설치된 6월16일 즈음이다. 개항은 모든 걸 바꿨다. 특히 중세에서 근대로, 근대에서 현대로 가는 길목에 '인천해관'이 버티고 서며 파수꾼 역할을 했다.부산과 원산에 이어 세 번째로 인천이 개항됐지만, 조선의 실질 개항은 인천이 문호를 열 때부터 시작된다. 3곳 중 가장 [개항 140년 다시 깨어나는 인천] ④항구가 열리며... 개항과 해관바다 길목에 '인천해관' 위풍당당 오는 6월16일은 인천해관 창립 140주년이 되는 날이다.인천은 부산, 원산보다 개항이 늦었지만, 첫 해관이 설치됐다. 그때부터 전국 1위 도시로 성큼 올랐다. 행정 수도 한성은 사람이 오갔을 뿐, 실질적 문물이 교차하는 공간은 인천이었다. 바다가 열린 인천의 길목에 인천해관이라는 빗장이 세워졌다.▶관련기사: [개항 140년 다시 깨어나는 인천] ④항구가 열리며 바다에 빗장이 세워지고 - 개항과 해관인천해관은 어마어마했다. 1903년 인도된 양무호로 조선은 휘청였다. 한 나라 예산의 10%, 국방 예산의 30%를 여기에 쏟았다. 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