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농장>에 '정치'는 없다

“교수님의 '정치적 발언'이 불편하다는 민원(?)이 들어 왔습니다. 삼가 주십시오.” 대학 행정부서에서 보내 온 전갈이다. 학기 시작 겨우 3주, 그것도 새내기 대학생이 행정실로 뛰어왔단다. 내가 수업에서 한 '정치적 발언'(?)때문에. 이를 해석하면, '대학교에서 정치란 소도(蘇塗)요 금기(禁忌)'란 뜻이다.

'나'는, 글에서 '나'라는 주어를 되도록 삼간다. 학문은 개별[나] 지(知,앎)의 행위에서 1인칭 복수인 '우리'라는 보편성, 즉 반증가능성(Falsifiability)으로 이행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글은 1인칭 단수인 '나'를 써야겠다. '정치적 발언' 운운을 변명하자면, 수업에 '나'는 어느 당을 지지한 적이 결단코, 단 한 번도 없다. 시대의 공민(共悶)과 사회의 공분(公憤)을 이야기했을 뿐이다. 나는 조선후기 실학들을 중심으로 연구하며 글 쓰는 학자요,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이다. 내가 수업에 말하는 정치는 '이 나라를 이끌 대학생으로서 우리 삶의 분모인 정치에 늘 깨어있어야 한다'는 주문이다. 정치(政治)란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인간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 “우리시대는 정치와 거리를 두는 일 같은 건 없다. 모든 문제가 정치이기 때문이다.” <동물농장>을 지은 조지오웰이 「정치와 영어」에서 한 말이다.

내가 수업하는 과목은 '문제 해결을 위한 글쓰기'다. 대학인으로서 반드시 이수할 교양필수이다. '교양(敎養)'은 리버럴 아트(liberal arts)로 정형화된 관습에서 벗어난 자유인을 지향하는 교육이다. '문제(問題)'란 해답을 요구하거나 논쟁·논의·연구 따위 대상으로 해결하기 난처한 문젯거리요, 대학생으로서 첫 지(앎)의 행위다. '문젯거리'를 찾는 것부터 쉽지 않다. 이를 해결(解決)하는 글쓰기는 더 어렵다. 이 어려운 과정을 수행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나'이다. “남보다 잘 쓰려 말고 남과 다른 글을 써라” 늘 학생들에게 주문처럼 외우게 한다. 글쓰기 첫 계명이다. 남과 다른 글을 쓰려면 글 쓰는 학생의 주관이 굳건해야 한다. 주관이 굳세야 보는 것의 한계를 보고 듣는 것의 한계를 들어 남과 다른 견해로 글을 쓴다. 견해는 논리성과 합리성을 갖춘 해결방법이다. '내[나]'가 없으면 문제도 해결도 글쓰기도 없다.

문젯거리를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하나? 문젯거리는 우리가 사는 인정물태(人情物態, 우리 삶이 녹아 있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일체)에 있다. 인정물태 범위는 바퀴살처럼 '나'를 중심으로 360도로 방사(放射)한다. 인정물태를 샅샅이 톺아나가면서 살펴야 문젯거리를 찾는다. 그런데 인정물태에서 '정치'를 빼란다. 대학생이 교수에게, '정치'는 말하지 말고 '주관적인 견해'도 삼가란다. 대학은 고등교육기관이다. 국정 교과서나 검인정 교과서를 가르치고 배우는 초등·중등교육기관이 아니다. 대학은 국가와 인류 사회 발전에 필요한 학술 이론과 응용 방법을 교수하고 연구하며, 지성인으로서 인격을 도야하는 곳이다. 교수된 자는 학자적 양심을 바탕으로 한 비평과 미래지향이라는 필요충분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연구와 학문 대상에 그 어떠한 성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학문의 이상은 국가와 인류 사회 발전, 즉 아름다운 대동세계(大同世界)를 지향한다. 왕권국가 시절에도 연암 박지원, 다산 정약용 같은 이들은 학문을 하여 칼 같은 말과 글로 왕도정치를 지향했다. 이 지향을 향해 가는 길이 학문의 길이요, 학자의 길이다. 그런데 교수에게 정치에 대한 발언을 삼가달란다. 그렇다면 '정치외교학과'는 아예 없어져야 하지 않나? 여기가 대학 맞나? 혹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박정희, 아니면 전두환 정권 시대로 돌아갔나? 나는 고등학교 교사로 시작하여 대학에서 강의한 지 올해로 35년이니, 35년 전부터 정치 이야기를 하였다. 이런 상황을 처음 맞닥뜨린 것은 작년이다. 올해 또 이러고 보니 이는 무례한 대학생과 오만한 교수의 해프닝이 아닌, 사회 보편적인 문제인 듯하다. 작년부터만 내가 갑자기 정치 운운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곰곰 생각 끝에 내린 답은 우리 정치인들과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정치 혐오증(politics aversion)' 때문이다. 당동벌이(黨同伐異,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이익에 의해 내 편과 네 편을 가름)로 정치를 일삼는 정치꾼들이 지역을 가르고 계층과 성별까지 갈라놓았다. 기성세대들은 '부모 자식 간에도 정치 이야기는 하지 마라'를 금언처럼 여긴다. 생각해보니 카톡방에서도, 친구 간에도, 정치 이야기는 하지 마라가 이 나라의 불문율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정치혐오증 불로소득은 누구의 것이고 누가 피해를 보나?

이익(李瀷,1681∼1763) 선생의 <곽우록(藿憂錄)>이 있다. '콩 곽(藿)'은 백성이요, '근심 우(憂)'는 걱정이니, '백성이 걱정한 책'이라는 뜻이다. '곽식자'인 콩잎 먹고사는 백성이 '육식자'인 고기반찬 먹고 사는 관리에게 정치 잘하라는 말이다. 육식자가 정치를 잘못하면 곽식자는 '간뇌도지(肝腦塗地,간과 뇌가 들판에 흩어짐)'하기 때문이다. 간뇌도지는 백성의 참혹한 죽음을 형상화한 말이다. 선생이 『곽우록』을 지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게 학자의 길이다. 사서(四書)와 삼경(三經)도 이이, 이황 선생도 모두 배움이 무엇을 위한 배움인가. 배움이 부채살을 타고 중심부로 모인 곳이 바로 정치다. 바로 인간의 특질 중 하나인 '호모폴리티쿠스(Homo politicus,정치를 통하여 사회생활을 이루어 가는 특질. 정치적 인간)'의 실현이다.

잠시 독일 교육을 본다. 저이들은 '성교육'을 '정치교육'이라 한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 이론에서 인간을 '초자아(superego, 사회나 기성세대로부터 습득한 사회의식)', '자아(ego, 주체인 나)', '리비도(Libido, 성욕과 식욕)'로 이해했다. 리비도를 느낄 때 자아가 형성된다. 초자아가 리비도를 부정할 때 자아는 죄책감에 빠져들며 정체성과 주체성을 찾지 못한다. 반대로 리비도를 인정할 때 자아는 강해진다. 리비도는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삶을 지속시키는 에너지원으로까지 학계에서 받아들인다. 독일 철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민주주의 최대 적은 약한 자아'라 하였다. 저이들은 민주주의에서 가장 필요한 '강한 자아'를 갖기 위해 '성교육=정치교육'으로 묶었다. 또 민주주의 국민으로서 '올바른 정치의식'을 갖도록 초등학교부터 '저항권 교육'을 한다. 초등학생 때부터 비판적으로 사회를 보도록 가르치고 정치행위나 집회를 보장하고 이를 학교와 국가가 보호하고 현 정치에 반영한다.

우리 사회는 정치꾼들과 기성세대인 '초자아'가 강한 나라다. 고등교육기관인 대학에서마저 '저항권 교육'은커녕 '정치 혐오증'으로 '정치'가 금기어 되면 우리 삶은 어떻게 될까?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에 '정치'는 없다.

/휴헌(休軒) 간호윤 (簡鎬允·문학박사):

인하대학교 초빙교수·고전독작가(古典讀作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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