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선웅 인천문화재단 이사∙판화가.
▲ 홍선웅 인천문화재단 이사∙판화가.

유난히도 추위가 심했던 소한에 광양 다압면의 소학정 백매와 낙안평야가 내려다보이는 순천의 금둔사 납월매가 화사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납월매는 만첩홍매로 남도에서는 가장 일찍 피는 매화이다. 이제 3월 상순경부터는 섬진강변 매화마을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매화절기가 시작된다. 수령이 620년 된 순천 선암사의 선암매와 경내 고매의 운치는 엄숙할 정도로 아름답다. 그리고 색이 붉어 흑매라 불리는 구례 화엄사의 각황전 홍매와 송광사 송광매, 백양사 고불매 순으로 남도 탐매 길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영남의 매화 탐방길 또한 화려하다. 통도사 영각 앞 자장매의 붉은빛 고운 자태와 함께 김해 건설공고의 와룡매, 산천재의 남명매 그리고 도산서원 매화정원까지 매화향이 이어진다. 추위와 눈보라 속에서도 은은한 향기를 피우는 절집 노매의 고고한 풍치 앞에서 탐매객의 마음은 설레 일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눈 속의 설중매는 옛 그림 속에도 자주 등장한다. 조선시대 심사정의 ‘파교심매도(灞橋尋梅圖)’는 가장 대표적인 그림으로 설산에 나귀를 타고 눈 속에 핀 매화를 찾아 나서는 당나라 시인 맹호연의 고사를 표현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일찍이 고려 왕건 능에서 송. 죽. 매를 그린 ‘세한삼우도’가 발견되었고 이후 매화는 사군자와 함께 도자기, 가구, 장신구 등 생활문화 속에 뿌리내리며 대중의 사랑을 받아왔다. 이렇게 매화가 대중의 삶 속에서 사랑을 받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설의 추위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매화에서 인내를 초극하는 아름다움을 발견했고 그 강인한 본성을 본받아야 할 이상적인 표상으로 삼은 데 있다. 부연하자면 조선 초에 성리학이 도입되면서 ‘인간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라는 도덕적 품성론이 추위 속에서도 고고하게 자신을 열어 보이는 매화의 고결한 기품과 비유되어 시문학과 예술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게 된다. 인간다운 품성과 행동을 학습과 수기를 통해 완성하고자 했던 유가에서 매화는 절제와 지조의 표상으로 인간이 본받아야 할 상징성을 지니고 있었던 셈이다. 그중에서도 평생을 매화에 마음 붙이고 산 퇴계선생은 91수의 시가 들어 있는 <매화시첩>을 쓰기도 했다. ‘도산 달밤에 매화를 읊다’이다.

뜨락을 거니니 달이 나를 따라오네/ 매화 꽃 언저리를 몇 번이나 돌았던가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나길 잊었더니/ 옷깃에는 향기 가득 달그림자 몸에 닿네

청자 매화등(梅花凳)에 앉아 매화 곁을 떠날 줄 몰랐던 퇴계의 그림 같은 시이다.

안동시는 오래전부터 도산서원을 매화정원으로 조성하고 있다. 퇴계와 매화라는 스토리텔링과 서원의 문화시설, 다양한 매화 품종의 식재를 통해 관광자원으로서 지역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있다. 인천도 일찍이 문화비전에 대한 다양한 정책 수립을 통해 문화도시로의 이미지 개선에 노력해 왔다. 그러나 놓치는 부분도 있어 보인다. 그중의 하나가 매화 정신을 통한 문화유산의 보편적 가치를 회복하고 문화산업으로의 공공성을 획득하는 일이다. 3만5000 그루의 매화나무가 식재되어 있는 난징 매화산과 320여 가지 매화 품종이 있는 우한시 동호매화원은 중국이 자랑하는 매화정원이다. 일본도 매화의 역사가 깊다. 에도 시대부터 만들었다는 이바라키현 미토시의 가이라쿠엔(偕樂園) 매화정원과 스가와라 미치자네의 비매 전설이 전해오는 디자이후 텐만구(天滿宮) 매화정원도 많은 사람이 찾는 관광명소이다. 인천도 인천대공원을 비롯해 시민의 접근성이 좋은 공원과 녹지가 많이 있다. 이곳에서 매화가 지닌 깨끗하고 맑은, 마치 영혼을 일깨우는 듯한 매화 향기가 퍼져 나간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홍선웅 인천문화재단 이사∙판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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