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회 걸쳐 7215명 항해 떠나
낯선 땅서 독립운동 기금 모집
한인교회 거점 열망 뜨거워
인천은 120년 한국이민사의 뿌리가 되는 동네다. 1902년 12월22일 인천항 8부두에서 배를 타고 미국 하와이로 떠난 첫 공식 이민자를 시작으로 세계 곳곳에 한인들이 자리 잡아왔다. 하와이의 경우 1905년까지 모두 64차례에 걸쳐 한인 7215명이 '아메리칸 드림'을 향해 떠났고, 이들에게 집조(여권의 옛 이름)를 발급해주기 위해 대한제국 내 이민 지원기관 '수민원(綏民院)'이 만들어질 정도였다.
낯선 땅에서 농장 노동자로 일했던 그들은 팍팍한 삶 속에서도 조국 독립에 대한 꿈을 꺾지 않았다. 1909년 안중근 의사 저격 소식을 들은 한인들이 독립운동 기금을 처음 모집한 이후 1920년까지 하와이에서 모인 독립자금 규모만 300만달러 수준으로 알려졌다. 정치적인 분열로 20년 가까이 민족단체가 혼란을 겪는 사이에도 이들은 결코 독립이라는 '검은 꽃'을 포기하지 않았다.
▲해외에서 첫 독립기금을 모으다
1909년 10월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했다는 소식이 태평양을 넘어 전해졌다. 하와이 교포들은 안 의사의 재판 경비를 위한 의연금을 모집했고, 그해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무려 1595명이 성금을 내 2965달러를 모았다. 당시는 사탕수수 농장에서 10시간씩 일하는 노동자들이 매달 평균 17달러를 벌던 때인데, 밥값 등 최소 경비를 제외하면 가용 현금은 1∼4달러 수준에 불과했다.
이는 호놀룰루 한글신문 '신한국보'의 홍종표 주필이 1911년 출간한 '대동위인 안중근전'에 기록된 내용이다. 책에는 안 의사의 생애를 비롯해 의거 과정, 재판 경위 등이 기록돼있는데 의연금을 낸 하와이 교포들의 명단 전체도 지역·기관별로 나눠 실렸다. 당시 하와이 전체 한인 인구 4533명 가운데 무려 35%가 기부자로 이름을 올렸다.
이때는 미국·멕시코 모든 재외교포를 위한 민족단체 '대한인국민회'가 결성됐을 때다. 앞서 1907년까지 결성된 민족운동단체만 24곳이 넘을 정도로 하와이 내 독립에 대한 열망은 뜨거웠는데, 을사늑약 등으로 위기감을 느낀 이들이 힘을 모으며 '한인합성협회'가 만들어졌다. 이는 국민회 산하 하와이 지방총회의 기반이 됐다.
▲하와이에 피어난 '검은 꽃'
대한부인구제회는 1919년 4월 하와이에서 결성된 여성 독립운동단체다. 3·1 만세운동 이후 백인숙 선생 등 지역별 부인대표 41명이 공동대회를 열면서 공식 활동을 시작했고 이들은 민족대표 지원금 등을 마련하고자 독립선언서를 재인쇄한 포스터 3000장을 판매했다.
하와이로 이주한 한인 여성들 가운데엔 예비남편의 사진만 본 채 고국을 떠나온 이른바 '사진신부'가 많은 수를 차지했다. 1905년 일제에 의해 체결된 을사늑약으로 이민이 전면 금지되고 가족만이 건너갈 수 있게 되며 만들어진 풍습으로, 1942년까지 사진신부로 하와이에 건너간 이들만 1000여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들은 한인교회를 거점으로 활발한 독립운동을 벌여왔다.
백범 김구 선생과 막역하게 지내며 임시정부를 꾸준히 후원한 독립운동가 심영신 선생은 국권 강탈 이후인 1916년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던 남편과 재혼했다. 하와이에서 구제회 모금 활동을 시작으로 임시정부 지원을 위한 연합한인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활발한 움직임을 이어갔다. 2019년 건국훈장 애국장으로 추서됐다.
/김은희 기자 haru@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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