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물밀물

“잘 살아 보세!”라는 구호는 강력하다. 새마을운동을 집약한 슬로건이기도 하다.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는 전우익 선생이 1993년 펴낸 에세이집 제목이다. (TV 프로그램에 소개되면서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기억이 새롭다.) 하여튼, 위에서 아래로 조직적으로 시행된 새마을운동과 달리, 아래에서 아래로 이어진 “함께 잘 살자!” 실험의 뿌리는 깊다. 1930년대 '브나로드(농민 속으로)'에서 1950년대 4H운동까지 다종다양한 갈래가 이 꿈을 좇았다. 수원과 화성 일대는 그 중심지 가운데 한 곳이었다.

1961년 화성군 향남면 하길리에 '화남협업농장'이라는 새로운 농장이 설립됐다. 농장을 이끈 이건우, 조한규, 김병규 세 사람은 지역 부농의 후손이었고, 당대의 지식인이었으며, 꿈을 꾸는 사람들(dreamer)이었다. 이들은 이미 1950년대부터 향리에서 다양한 농촌운동을 꾸준히 벌여왔다. 화남협업농장은 시행착오 끝에 도달한 결론이었다. 이들이 인생과 전 재산을 걸었던 꿈은 함께 잘 사는 한국 농촌의 미래였다. 화남협업농장은 하길리에 농장 터를 마련하고 개간에 착수했다.

화남협업농장은 전쟁 상이용사, 제대군인, 수재민 등 이재민, 도시빈민 등 소문 듣고 찾아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한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것이 농장의 원칙이었다. 1966년 무렵 농장에는 20여 가구가 정착을 했고, 53만㎡가량의 농토가 개간되었다. 농장 일은 분업으로 이루어졌다. 보리 담당, 벼 담당, 닭 담당, 돼지 담당, 과일 담당, 건축 담당…. 농장은 이상적 농촌의 성공사례로 <경향신문>, <조선일보> 등에 크게 소개될 정도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화남협업농장은 지속되지 못했다. 분단국가의 반공프레임에 갇힌 사람들에게는 “함께 잘 살자!” 자체가 불온한 구호였다. 지역 경찰은 농장을 감시하면서 수시로 농장 사람들을 연행해 조사 명목으로 괴롭혔다. 지역 특무대(보안사령부의 전신)는 농장에 반 노골적으로 상납을 요구하기도 했다 한다. 1960년대 후반 농장은 결국 해체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관계자들은 이상 농촌의 꿈을 이어갔다. 화남협업농장은 생태주의 운동, 공동체 운동, 생협 운동의 바탕을 제공한 실험으로 기록되어 있다. (<화성시사 11 ; 현대 지역사회의 변화와 주민 생활>)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한갓 몽상일까, 아직 살아있는 이상일까. 후자라고 새삼 믿고 싶은 광복절 아침이어서 화남협업농장 얘기를 떠올려 보았다.

▲양훈도 논설위원.
▲양훈도 논설위원.

/양훈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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