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올림픽에서 2002월드컵까지 14년간은 인천만을 놓고 볼 때 격동의 역사였다고 할 만큼 변화의 폭이 컸다.
 인천국제공항, 송도신도시와 같은 대역사의 사업들이 벌어졌고 대형의 건축물들이 도시의 외관을 바꾸는 등 외형적이고 양적인 물리적 변화는 물론이겠거니와 시민사회가 꿈틀대는 질적·화학적 변화도 적지 않았다.
 88년 당시 그저 서울의 변두리였고 서울의 `베드타운""이라는 지적에도 어쩌지 못하는 한계를 보였던 인천은 이제 그나마 인천의 정체성을 찾자는 꾸준한 노력이 조금씩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고 있다.
 인천대를 시립화했고 시민단체들이 `인천적""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으며 동북아의 중심도시라는 작위적 개념도 알게 모르게 시민사회의 의식중심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인천의 환경을 지키고 인천의 문화와 인천의 역사를 제대로 되짚어내며 인천의 인물을 재조명하는 작업들도 간단없이 진행돼 왔다.
 굴업도 핵폐기장 계획이 이 과정에서 철회됐고 서해안 풍어제가 되살아났으며 고유섭과 조봉암 같은 인천의 인물들이 새 생명을 얻었다.
 학술·문예·환경·언론 등에서의 인천적 관점은 이제 인천학을 태동시키는 수준에까지 근접하고 있다.
 시민들의 호응이 아직은 미약해 요원의 불길 같은 동조는 없더라도 분명 씨앗은 뿌린 셈이다.
 세계축구의 변두리에 불과했던 한국이 월드컵 4강 신화를 일궈내면서 세계축구계에서의 위상이 변화됐듯, 한국을 움직이는 중심축에 언젠가는 `인천파워""가 명백히 자기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정신적 주추를 놓은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지난 14년간 인천의 인물로 따져 명실상부한 장관급 이상의 관직으로 명성을 날린 경우는 이승윤 전 부총리 정도에 불과하고 경제계에서는 한글과컴퓨터 창업자 이찬진씨가 한때의 유명세를 유지했던 정도이고 보면 향리 출신의 인물을 키우는 일이야 말로 오늘 인천의 당면과제라 아니할 수 없다.
 또 몇가지 지표에서 인천이 서울, 부산에 이어 한국의 3번째 대도시 반열에 서긴 했지만 타도시들이 아시안게임, 유니버시아드대회, 비엔날레 등을 유치하거나 개최할 정도로 도시적 역량을 키우고 있던 사이 인천은 등떠밀려 억지로 개최한 지난 99년 전국체전이 고작인 정도다.
 대규모 행사가 능사는 아니더라도 그런 정도의 시민·사회적 역량이 아직은 역부족임을 드러내는 사례다.
〈권혁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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