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이 끝났다. 한 달 동안 세계인에게 진한 감동을 주었던 붉은 악마들도 일상으로 돌아갔다. 변변한 축구리그도 없고 맨땅 운동장이 허다한 우리가 4강까지 올랐으니 음모론이 나올 만도 하다(?) 더구나 스스로의 몸값을 올리려고 애쓰는 외국선수들과 달리 오로지 경기를 위해서 순수한 열정으로 차고 달렸으니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이다. 알다시피 유럽은 축구로 날이 새고 지는 나라들이다. 영국도 예외는 아닌데 경기가 있는 날이면 엄청나게 큰 운동장에 빈틈이 없다. 가끔 훌리건(hulligan)들이 일을 저지르는 경우도 있지만 열띤 응원으로 고단한 하루를 잊는 분위기이다.
 그런데 영국의 텔레비전을 보면 신기한 것을 볼 수 있다. 우리처럼 연속극도 있지만 잘 생긴 사람들이 보이질 않는다.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을 평범한 모습으로 등장시키고 있다. 더더구나 뻑적지근한 부자가 화면에 나타나는 경우는 없다. 주말에는 가요프로그램도 보여주지만 10대들의 고성을 듣기는 어렵다. 이상한(?) 텔레비전이다. 우리의 화면에는 너나없이 잘 생긴 사람들로 넘치고, 거드름 피우는 부자들 때문에 속상할 때도 있으며, 꿈 많은 10대들은 시도 때도 없이 소리치고 눈물을 짠다. 이런 텔레비전의 부추김 덕분에 우리는 `성형공화국""으로 세계적인 명성까지 얻고 있다.
 그러면 `신사의 나라""에서 신사는 사라졌단 말인가? 오직 보통사람들만 눈에 띄니 말이다. 직업의 귀천도 없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만 같다. 하지만 영국도 경쟁이 지배하는 곳이고 사람마다 먹고 자고 입는 것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많다. 값싼 동유럽에서라도 얼굴을 고치는 사람, 축구보다 여우사냥을 즐기는 사람, 마약에 시달리는 젊은이들이 가득하다. 화려한 사람, 거만한 부자 그리고 스타를 쫓는 10대들이 없는 것이 아니라 텔레비전에서 보여주질 않는 것이다. 누군가가 프로그램을 하나씩 조사해서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을 구별하는 느낌이다.
 BBC도 인도사람이나 아프리칸들을 유별나게 많이 등장시킨 연속극까지 방송하는 것을 보면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사회적 갈등을 잠재우고 기존질서를 옹호하기 위해서 프로그램을 걸러내는 것이다. 물론 언론매체가 지배세력의 나팔수로 전락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중세에는 교회가 `불평분자""들을 교화했듯이 오늘날은 교육과 언론매체가 앞장서고 있다. 영국의 텔레비전은 잊을 만하면 버킹엄주식회사의 총수(?)인 여왕과 왕족들의 위엄 있는 모습을 비춰준다. 왕실을 신비화하고 국민들에게 충성심과 경외심을 세뇌하기 위해서 준비된 화면을 계속 돌려대는 것이다.
 한때 영국의 `제3의 길""을 주목한 사람들이 있었다. 경제의 효율성과 형평성을 조화시키려는 의지가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형평이란 노동자계급에 대한 지배세력의 통제와 관리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이럴 때 텔레비전이 더 없는 선전도구가 되는 것은 물론이다. 영국은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생산력만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에 대한 `사회적 포섭""도 한층 강화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부자와 `꽃미남""들이 뭇사람의 기를 죽이는(?) 우리의 텔레비전은 차리리 순진하다. 템즈강을 거니는 사람은 젠틀맨이 아니라 바로 여왕의 신민(臣民)이기 때문이다.<&27831>영국 맨처스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