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교산(光敎山)은 한남 금북정맥(漢南 錦北正脈)의 주봉(主峰)으로 수원을 비롯해 성남, 용인, 의왕시에 걸쳐 있으며 풍수지리학은 물론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도 수원의 진산(鎭山)으로 기록돼 있다. 진산이란 도읍이나 성시(城市:성이 있는 시가) 등의 뒤쪽에 있는 큰 산을 가리킨다.
 광교산은 고려 태조 왕건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는 산이라 하여 본래 광옥산이라 부르던 것을 개명한 것으로 89개 암자가 있었다고 전한다. 이르는 곳마다 부처가 있다는 경주 남산과 가히 비교의 상대가 되리라 본다.
 그러나 오늘날 두 산이 걷고 있는 길은 사뭇 다르다. 남산이 그대로 불교 박물관이요 유적지라 한다면 광교산은 고단했던 일상으로부터 휴식을 즐기고 삶의 활력을 재충전하려는 1백만 수원시민과 인근 시·군민들의 심신수련장이다.
 비록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지만 광교산은 불교문화의 보고요 수많은 사연을 간직한 채 우리의 발길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또 청정지역임을 증명하는 반딧불이와 각종 동식물들이 자연의 질서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생태학습의 장이기도 하다.
 광교산에는 많은 고적이 전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김준룡 장군(金俊龍 將軍)의 전승지(戰勝地)와 전승비(戰勝碑)일 것이다. 많은 사람이 광교산을 오르지만 호항골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호항골(胡降谷)""은 하광교 소류지로부터 위쪽으로 펼쳐진 골짜기로 병자호란때 김준룡 장군이 청나라 군대를 맞아 대승을 거뒀다는 곳이다. 골짜기 위쪽에는 광교암(光敎巖)이란 바위가 있고 그곳엔 조선시대 좌의정을 지낸 채제공의 글씨로 장군의 전공을 새긴 전승비가 있다.
 `수원군읍지""에 따르면 화성 축성때 성역(城役)에 필요한 석재를 구하러 광교산에 갔던 사람들로부터 병자호란 당시 김준룡 장군의 전공을 전해들은 성역총리대신 채제공이 청군이 항복했다는 호항곡 꼭대기 자연암벽에 `충양공 김준룡 장군 전승지(忠襄公 金俊龍 將軍 戰勝地)""라 새겼으며 그 글씨 좌우에 `병자청란 공제호남병 근왕지차 살청삼대장(丙子淸亂 公提湖南兵 勤王至此 殺淸三大將)""이라고 음각한 비문이 지금도 남아있다.
 김준룡 장군은 1609년(선조14) 무과에 급제, 여러 고을 관직을 거친 뒤 전라병마절도사로 재임중이었다.
 나만갑의 `병자록(丙子錄)""에 “전라병사 김준룡은 광교산에 도착해 빠르고 용감한 군사를 뽑아 방진(方陣)을 치게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면(四面)에서 밖을 향해 공격할 수 있도록 했다. 양식은 진 가운데 두는 방법으로 적과 맞서 싸울 준비를 했다. 남한산성을 공격하던 적들은 불과 30리 가량의 거리에 있는 광교산을 날마다 공격해 왔지만 손에 넣을 수가 없었다. 수많은 적군들과 이름난 장수가 죽었다. 죽은 적장 가운데 청 태종 한(汗)의 사위인 장수가 있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김준룡 장군은 호남병마절도사 재위시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남한산성에 포위돼 갇히게 되자 근왕병(勤王兵)을 이끌고 10여일만에 광교산에 진을 치고 청군을 맞아 격전을 벌인 끝에 청 태종의 사위 양길리(樣吉利:백양고라(白羊高羅)라고도 한다)를 포함한 3명의 적장을 사살하고 그 기세를 타고 적의 유격기병대를 격파했다.
 청군은 광교산 계곡 곳곳에 쌓인 동료들의 시체를 태우며 처절한 곡성을 터뜨리기까지 했다고 해 오늘날 이 골짜기를 `호항골""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강서문화원에서 펴낸 `강서문화와 역사""에 보면 김준룡은 본관이 원주로 양천(陽川-오늘날 강서구) 출신이며 묘와 신도비가 능곡(화곡4동 신곡초등학교 옆)에 있는 것으로 돼있다. 아무튼 호항골이 병자호란의 최대 격전지였으며 전승지였다는 사실은 광교산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광교산을 찾는 등산객 중에는 이러한 유적지가 있음을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이며 기념비의 마멸이 심해간다는 점이다.

김용국·향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