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환 논설실장

'기획'이라는 말이 한 시대를 풍미하던 때가 있었다. 경제개발이 시작된 1960년대부터 고도성장을 구가하기까지 한 세대(30년)간에 걸쳐서였다. 1961년 7월 정부에 처음으로 경제기획원이 설치됐다. 국가경제정책을 총괄하는 중앙행정부서로 수장이 부총리였다. 경제개발계획 수립, 국가예산 편성, 투자우선순위 결정 등 막강한 권한의 부처였다. 그 이전 정부의 부흥부와는 '기획'이라는 이름에서부터 힘이 실렸다. 김학렬, 장기영, 남덕우, 김정렬 등 스타급 경제관료들이 배출됐다.

▶기획(Planning)은 프로그마티즘 전통의 미국 행정학의 산물이다.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가장 효율적인 로드맵과 접근법을 개발_선택하는 작업이다. 계획(Plan)-프로그램-프로젝트 등은 그 결과물이다. 쉽게 말해 일을 꾸미고 짜맞추는 과정이다. 경제개발이 최대 화두였던 3공화국이 국가행정 전반에 기획을 도입했다. 그 이전까지는 내무국이나 총무과 등이 우두머리 부서였다. 관리나 통제가 행정의 전부이던 시대다. 행정조직마다 기획관리실 등이 설치됐다. 그냥 관리만 할 게 아니라 돈이 될 일들을 찾아 벌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획실은 조직의 브레인이었고 기획실 근무는 엘리트로 꼽히던 시절이다.

▶기획은 곧 민간부문으로 확산됐다. 고도성장기에 잘나가던 광고업계에서부터 유행했다. 삼성그룹의 제일기획, 현대그룹의 금강기획, 럭키금성그룹의 희성기획, 롯데그룹의 대홍기획 등등이다. 머리를 짜내야 하는 광고업계의 창의성 이미지와도 걸맞았다. 대기업그룹들에서는 기획조정실장이 최고 실세를 뜻하는 직함이 됐다. 신문사 산업부 기자들의 취재 역량이 그룹 기조실장과의 친소 관계에 따라 갈리던 시절이다. 기획수사도 유행했다. 토착비리, 서민대상 경제사범 척결 수사 등이다. 창간기획, 특별기획 등 언론사의 기획기사는 오랜 시간 공을 들인 역작임을 의미했다.

▶지난주 경기남부경찰청이 대규모 기획부동산 사범들을 일망타진했다고 발표했다. 검거된 15명이 팔아치운 땅만 515필지에 판매액이 1300억원에 달한다. 이들이 242억원을 챙긴 대가로 피해자만 1000명 이상을 헤아린다고 한다. 개발제한구역이나 맹지 등 가치 없는 땅을 개발호재가 있는 것처럼 속여 시세보다 비싸게 팔아넘기는 수법이다. 땅 판매액의 10%를 수수료로 지급하고 해외여행을 보내주는 등 다단계식 실적 경쟁까지 붙였다. 피해자들 중에는 상담원 본인이나 친인척들도 많았다고 한다.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기획부동산 조심' 글도 많이 올라온다. 첫째, 연락이 없던 지인이 갑자기 부동산 투자를 권유해 오면 조심하라. 둘째 지뿐 쪼개기식 등기를 의심하라, 셋째, “남은 매물이 별로 없다”는 말에 속지마라 등이다. 어려운 시기를 당해 호구지책으로 기획부동산에 가담했을 서민들의 눈물에 가슴이 아프다. 한 때 빛나던 '기획'이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정기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