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국해관에서 발행한 소룡 우표(상단). 아래 사진은 1889년 7월 인천해관 소인(JENCHUAN CUSTOMS)이 찍힌 칸다린 우표.

조선의 우편이 중단된 상태인데 우표판매만 계속됐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상하다. 우표판매를 했다면 우편물 접수와 발송 배달 등 시스템도 갖췄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겠는가? 이말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이, 서울 총해관과 함께 인천, 원산, 부산해관에서 소인처리된 실체봉투와 함께 우표들이 수집가들 사이에 돌아다니고 있어 조선해관에서 청국우표와 함께 국내외로 발송되는 우편물 처리사실을 확실히 증언하고 있다.

또 하나 추가하면, 이듬 해 1890년 10월 15일자 인천해관 서리세무사가 된 영국인 죤스턴(J. C. Johnston)은 다시 청국우표 3000매 수령사실을 보고하면서 서두에 근거 문건이 총해관에서 1889년 4월 12일 발송한 공문번호 555라고 밝히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날자와 공문번호가 계속 언급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사실상 이날이 해관에서 청국우표를 처음 취급한 날로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시간이 흘러 마침내 1895년, 조선 정부에 의해 우편사업이 재개되었다. 정부에서도 해관이 자체적으로 우편사업을 운영중이라는 것을 알았으므로 단일화를 위해 공문을 보내 여러 차례 중단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유는 알 수 없으나 해관은 이를 무시하고 사업을 지속하였다. 1897년 5월 25일 인천해관서리세무사 오스본 (W. Mc. Osborne)이 총해관에 2000매의 우표를 수령했다는 기록과, 수량은 줄었으나 1898년 1월 12일 1500매의 우표를 총해관에 신청하고 있는 것만 봐도 해관의 굳은 의지가 드러난다.

저명한 일본인 우표수집연구가인 '미즈하라 메이소'의 연구에 의하면 조선해관에 의한 우편사무취급은 1899년까지도 지속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조선해관에 의한 택배사업과 우편사업은 정부의 개입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상당기간 운영되었다. 이 사업의 추진을 위해서 해관에서는 특별히 이를 관장하는 부서를 따로 두었고, 총세무사 메릴은 해관 창설기 부터 4년간 이어져 온 경인택배사업을 더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인천해관에서 정기적으로 회계보고를 하도록 했다.

인천해관에서 총해관에 발송한 보고서에 따르면 해당 조직명을 'Jenchuan Customs Postal Department'라고 적었다. 인천해관 우편국이라 번역할 수 있겠다. 그런데 택배부문은 회계보고만 서리세무사 명의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다르다. 택배사업은 해를 갈수록 안정적인 고객확보와 서비스에 대한 신뢰를 얻어 성공을 거두었고 이를 맡은 신차인을 추가 투입할 정도로 성장하였을 뿐 아니라 제복과 제모를 지급(Uniform for Letter Carrier)하고 가방(信包)까지 휴대할 정도로 자리를 잡았다.

이 사업은 원래 청나라해관에서 택배와 우편을 경험한 해관원들이 조선해관에 근무하면서 국내외의 가족, 지인과 연락을 취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혹자는 특히 우편사업을 가르켜 청국해관 총세무사의 지령을

받아 조선해관에 우편국을 설치 운영한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 주장을 입증할만한 어떠한 자료도 없는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다만 청국우표를 매년 수천매씩 구입하고 조선해관 소인이 찍힌 우편물이 청국을 경유해 해외에서 발견되는 사례를 볼 때, 청국해관과 상호 우편물 취급규칙과 처리절차가 따로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조선해관우편은 근대 우정제도가 폐지된 지 4년 4개월 만에 독자적으로 시행되고 14년간 운영된 시스템으로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될 또 하나의 살아있는 역사이다. 따라서 우리 우편사의 일부로서 정당하게 평가받고 기꺼이 포용해야 한다.

/김성수 서울본부세관 6심사관 column@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