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한 바퀴-부둣가, 그 삶을 읽다] 1. 프롤로그
[현대사 한 바퀴-부둣가, 그 삶을 읽다] 1. 프롤로그
  • 박정환
  • 승인 2020.07.22 19:08
  • 수정 2020.08.05 15:10
  • 2020.07.23 7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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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릿한 부둣가,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1970년대 연안부두 땅 사기사건으로
상가 다닥다닥, 길없는 활어도매시장 탄생
새벽부터 왁자지껄 생기로 하루 시작

새우잡이·고깃배로 가득했던 북성포구
화수·만석부두·소래포구가 인천의 속살
▲ 1990년 12월 연안부두 새벽 어시장 상인들이 활기차게 하루를 열고 있다. /인천일보DB
▲ 인천 중구 연안부두 선착장에서 어민들이 잡아온 주꾸미를 크기별로 구분하고 있다.
▲ 인천 중구 연안부두 선착장에서 어민들이 잡아온 주꾸미를 크기별로 구분하고 있다.
▲ 1990년 12월 연안부두 새벽 어시장 상인 모습.
▲ 1990년 12월 연안부두 새벽 어시장 상인 모습.
▲ 1970년대 이전 북성동 여객선 부두.
▲ 1970년대 이전 북성동 여객선 부두.

 

세상이 잠든 까만 새벽, 전쟁 같은 삶을 사는 이들이 있다. 인천시 중구 연안부두 수산물길 활어도매 시장 사람들이다. 왁자지껄하기가 예전만 못하지만 아직도 그곳은 생기로 하루를 연다.

수조트럭과 물차들의 큼지막한 시동소리가 거리에 그득하다. 도로가에 댄 차안에서 선잠으로 남해에서 밤새 달려온 피로를 삭히는 운전사, 차 지붕으로 뛰어 올라 어린 아이도 들어갈 만한 크기의 뜰채를 연신 휘젓는 기사, 물에 만 밥을 한 큰 술 입에 우겨넣고, 수족관으로 달음질하는 사장님, 물 밖으로 나와 퍼덕거리는 온 광어, 우럭, 농어, 노래미를 플라스틱 궤짝별로 나눠 수족관으로 쏜살같이 뛰는 점원들의 입에선 단내가 난다.

대동강 물을 장사 밑천으로 삼았다는 영화나 소설 속 '봉이 김선달'의 얘기는 여기 수산물길에서 현실로 되살아난다. 바닷물 판매업체 앞마당에 물탱크 차들이 줄을 잇는다. 파란 고무호스는 주유기처럼 해수를 콸콸 쏟아낸다. 탱크를 채운 물차는 바닷물 구경이 힘든 서울 노랑진 수산시장으로 냅다 달린다. 치열했던 두어 시간, 수산물길에는 어슴푸레 동이 튼다.

IMF사태 직후 1998년에도 연안부두 활어도매시장의 연간 매출액은 어림잡아 5000억 원이 넘었다. 연안부두 활어도매시장의 유통량과 유통망을 따라올 수산시장은 전국 어디에도 없었다. 하루 100~150톤 가량을 소화해 냈던 연안부두 활어도매시장의 유통권역은 서울, 경기뿐만 아니라 강원과 충청 일부였다. 국내 수산물 시장의 50%가 거래권 안이었다.

연안부두 활어도매시장 탄생의 비밀에는 '소설 같은' 사실이 숨어있다. 1966년 3월 H사는 항동과 북성동 등 연안부두 일대 갯벌 94만3800㎡에 대해 건설부로부터 매립허가를 받았다. 매립 목적은 임해공업지와 하역장 조성이었다.

1973년 5월 허가 면적의 35%를 메운 H사는 '작업'에 들어갔다. 사업비가 모자라자 '공업용지에서 상업용지로 바뀐다'는 소문을 퍼뜨려 수십 명에게 3.3㎡ 당 3만 원에서 66만 원씩에 땅을 팔았다. 팔린 땅은 얼추 33개 필지 4만2900㎡였다.

속도 모르고 땅을 덥썩 물은 사람들은 골탕을 먹었다. 상가건물을 짓기로 낸 건축허가 신청서는 늘 반려였다. 행정청이 '공장용지에 무슨 상가를 짓느냐'며 번번이 퇴짜를 놓았다.

연안부두 땅 사기 사건은 이내 사회문제로 번졌다. 인천경찰서는 동향보고서를 시장에게 전달했다. '연안부두는 각종 여객선과 어항선 등으로 하루 평균 2000명이 왕래하는데 부수 건물과 시설이 없어 생활에 지장이 막심하니 하루빨리 용도 변경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동향보고서 내용의 소문이 퍼지자 연안부두 일대 땅을 사려는 이들이 떼로 몰렸다. 이윽고 공장 대신 상업 시설들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도로는 상가 건물에 빼앗겼다. 연안부두 활어도매시장 일대에 이면도로가 없는 이유다.

그곳의 가난은 하염없는 가난이다. 그 가난은 가난하지 않은 자들이 가난 앞에서 베푸는 온유함이야말로 얼마나 시답지 않은가를 한 순간에 깨우쳐 주는 가난이다. 인천역 건너편 북성동 사람들의 가난은 그래서 더욱 서럽다.

마주한 한 쪽이 가로로 몸을 틀어야 서로 가나갈 수 있는 골목 길 양쪽에는 '하꼬방' 집들이 쭉 들어 차 있다. '됫박방'들의 구멍 난 창은 유리 대신 널빤지다. '새우젓골', '뱀골'의 옛 이름은 출처 불명의 새 이름 '은잔디길'과 '금잔디길'로 지워졌다.

하루 1만원 벌이도 안 되는 마늘까기로 70대 노구(老軀)는 남루한 하루하루를 잇댄다. 마늘 냄새에 눈이 침침해도, 마늘 독기에 손가락 마디가 아려도 마늘까기용 칼을 놓을 수 없다.

북성동은 원래 비루한 동네는 아니었다. 동양 최대의 인천항 도크 건설로 1973년 이곳 여객선 부두와 어시장이 연안동으로 빠지기 전만해도 기름진 동네였다.

북성동1가 3통의 '새우젓골'과 '뱀골'도 그때 이름을 얻었다. 새우젓골 안쪽에 커다란 소금창고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전국 새우잡이 배들이 꼬였고, 북성3통은 드럼통에 새우젓 담는 골목으로 흥청거렸다. 1960년대만 해도 맥주를 파는 다방과 당구장, 여관 등으로 북성동은 '인천 돈의 절반이 모이는 곳'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북성동1가 2통의 '뱀골'에는 '색싯집'이 즐비했다. 선주와 선원들이 뒤섞여 북성동 술집에서 며칠 낮밤을 술로 보내기도 했다. 술값으로 돈이 떨어진 선원들에게 막걸리 한잔에 공짜 안주로 나오던 것이 물텀벙이었다.

색싯집에 푹 빠져 여인숙에 장박(長泊)을 하던 뱀 장사꾼이 잡아놓은 뱀을 놓치는 바람에 동네 전체가 난리법석을 떨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뱀골'이라는 얘기가 있다.

아직도 우리 곁에는 비릿한 생선 내와 쭈꾸미 볶는 냄새가 피어오르는 북성포구가 있다. 연평도 조기잡이 배부터 옹진, 강화, 충청 앞바다 고깃배들로 그득해 1960~70년대 국내 3대 어항이었다는 화수부두, 물뿐 아니라 삼남지방에서 올라온 곡물도 넘쳤다는 만석부두, 염전과 협궤열차의 추억이 아련한 소래포구도 있다.

이것이 항도(港都), 인천의 속살이다. 인천일보는 '현대사 한바퀴'의 큰 제목 아래 부둣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부둣가, 그 삶을 읽다'를 연중 기획보도 한다.

/박정환 기자 hi21@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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