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평에 미군기지가 들어선 것이 6·25동란 때요 그보다 훨씬 이전인 30년대에 그곳을 일제가 기지로 했으니 부평의 군사기지 역사가 70여년은 되는 셈이다. 1931년 소위 만주사변으로 시작 중국대륙에 침략의 손길을 뻗친 일제는 제빨리 부평일대를 군수기지화했다.
 지금의 부평1동 동아 대림 산곡 3·4동의 현대 우성 등 아파트가 자리한 일대가 일제의 군수기지였다. 그곳에 조병창을 세워 각종 군수물자를 내보냈다. 부평평야를 관통하는 경인고속도로는 일제가 수송을 원활케하기 위해 착공한 국방도로 터였다. 오늘날 잘못 불려지는 미쓰비시니 삼능이니 다다구미니 하는 지명도 그 시절 공사업자나 종사자들의 사택 이름이었다.
 이때 일제 총독부는 국민총동원령을 공포 애꿎은 우리 젊은이들을 근로보국대라는 이름으로 공장에 투입했다. 특히 인천시내의 중학생들은 학교로의 등교가 아니라 경인선 열차에 실려 조병창의 산업전사가 되어야했다. 그때 제3공장장이던 일군 소좌 채병덕이 한일간에 야기되는 마찰을 해결해 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곳에 미군이 진주한 것은 6·25당시로 그들은 이곳을 애스컴이라고 했다. 이름하여 미군기지창의 영어 Army Service Command의 머리글자 ASCOM이다. 이곳에 기지가 들어서자 미군으로 인한 경기가 형성되었다. 사령부 정문앞은 기지촌이 들어서 이름조차 신촌이었다. 그러다 미군이 철수한다니까 지역경기에 영향을 미치면 어쩌나 했는데 그곳에 수출공업단지가 대신하기도 했다.
 그동안 세상은 참으로 많이 달라졌다는 느낌이다. 미군이 있어야 살 수있다고 하던 터에 이젠 하루가 멀다하고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땅을 돌려 달라며 목청을 높이는 시위가 반복되었다. 이제는 많이 빠져나갔음에도 광활한 땅덩어리를 몇십명이 차지하여 소음과 분진이 인근에 피해를 준다.
 그렇던 부평 미군부대 부지의 반환이 결정되자 벌써부터 사용을 놓고 관심이 높다. 진작에도 의견이 분분했지만 공공시설로 개발하겠단다. 어느모로나 당연하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