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창이며 모임 멤버들의 자녀 결혼 소식이 한 두건 씩 들려오더니 이제는 출산 소식들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그에 따라 단체 대화방의 프로필이 본인이 아니라 손주들의 사진들로 바뀌어 간다. "손주 자랑과 강아지 이야기는 만원씩들 내고 하세요." 우스갯 소리로 경고를 주지만 소용없다. 정작 자식 기를 때는 몰랐는데 손주는 더없이 예쁘단다. 방긋방긋 웃는 모습은 물론이거니와 젖 달라고 보채는 울음, 기침소리조차 예쁘다니 팔불출이 따로 없다. "꽃 중에 가장 예쁜 꽃이 사람 "이라던 할머니의 말씀을 이해할 나이들이 된 것이다.

첫아이를 출산하고 우울감에 시달렸다. 호르몬의 변화가 원인이라지만 심리적 요인도 만만찮았다. 출산과 더불어 일을 놓았으니 경력단절에 대한 불안감과 연습 한 번 없이 엄마가 된다는 사실에 육아에 대한 부담은 가슴 한복판에 집채만한 바윗돌을 올려놓은 꼴이었다. '저 핏덩이를 어찌 하나' 육아 지침서를 놓고 단계별 성장 과정을 체크하고 그것에 우리 아이가 더하거나 덜하면 잘못된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서곤 했다.

육아에 대해 적당한 타협을 할 줄 몰랐던 나는 모든 이유식이며 먹거리를 직접 만들었고 헝겊기저귀 사용을 고집해 늘 손목이 시큰거렸었다. 그리고 10살 터울의 막내 출산. 막내는 첫아이 때와는 달리 적당한 타협육아로 일회용 기저귀도 가끔 사용했으며 마트에서 파는 이유식도 사다 먹였다. 하지만 아이가 달랐다. 막내는 울음 끝이 길었다. 엄마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잠에서 깨어나면 늘 울었고 새벽까지 등에 업혀 잠을 재워야 했다. 노산으로 체력이 딸려 이번엔 졸음과의 전쟁이었다. 몸이 너무 힘드니 한동안 아이가 예쁘지 않았다.

직장에 다니는 큰딸이 아이를 가지려 한다. 모임 멤버들이 보여준 팔불출은 곧 나의 모습이 될 듯하다. 거리에서나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아기들의 모습이 예뻐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하품하는 모습이며 주먹 쥔 손과 똘망똘망 쳐다보는 순박한 얼굴은 보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고 편안해진다. 할머니가 된 친구도 하루하루 달라지는 손주 모습이 궁금해서 4시간 거리의 딸네 집을 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다녀온다 한다. 손주 보는 재미가 어찌 좋은 지 시간가는 줄 모른다 한다. 정작 자신의 아이는 그리 예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덧붙이며. 전격 공감이다.

아이를 키워낸 경험의 축적은 여유를 준다. 한 번 건너 본 강물인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코앞에 들이대면 아름다움을 알 수 없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첫아이는 초조와 강박으로 키워내기 마련이다. 내 아이는 다른 아이보다 빨리 뒤집어야 하고 옹알이도 빨리해야 하고 배변가리기도 빨리해야 한다. 성장 과정이 육아백과 내용과 일치해야 마음이 놓인다. 그런 것들이 육아과정의 기쁨을 놓치게 한다.

하지만 손주는 아무래도 한 다리 건너다. 아기에게 생기는 문제는 할머니의 직접적 문제가 아니라 우선은 아들·며느리·딸과 사위의 문제다. 어차피 육아 방식도 다르고 간섭해 봐야 좋을 것도 없다. 적당한 거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니 예쁜 것이다. 그 거리 때문에 사랑이 기쁨이 소중함이 보인다. 그리고 더 사랑할 수 있다. 떨어져야 잘 보이는 것들이 있다.

이영미 인천 송도소식지 주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