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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에서 만나는 근대도시 인천] 上 개항도시

우리땅의 '외국인 타운' … '감리서'는 내동에 우뚝

2018년 01월 04일 00:05 목요일
▲ 일본조계. 일본은 1882년 7월 부두에서 가까우면서도 매립이 가능한 해안지대 약 7000평을 조계로 정했다.
▲ 청국조계. 1884년 3월 조선은 청국과 장정을 체결하고 일본조계 서쪽 약 5000평의 땅을 청국조계로 설정했다.
▲ 인천항 감리서가 발급한 토지문서.
출입국 등 관리 위한 인천항 감리, 행정·통상 업무 총괄

내동 중심 관공서·은행·객주상점 들어서 근대도시 변모

20여곳 조선인 가옥 2300호 불어나고 인구도 9000명 급증




글 싣는 순서

上. 개항도시
中. 진센과 인천의 양면
下. 군수공업도시

인천시립박물관의 인천도시역사관(인천시 연수구 인천타워대로 238)이 지난달 19일 문을 열었다. 인천도시역사의 변화과정을 담아 인천의 어제와 오늘, 내일을 조명한 공간이다. 여느 박물관이나 역사관하고는 다른 관점에서 도시의 변화과정을 풀어낸다. '인천'이라는 도시를 국가사적인 중앙의 관점에서 접근한 것이 아니라 지역사의 관점에서 시대구분을 해서 '인천'을 새롭게 재해석했다.

컴팩스마트시티라는 이름으로 운영해 왔던 건축물을 리모델링한 인천도시역사관은 연차적인 공사계획에 따라 지난해 12월 1층 근대 도시관을 개관한데 이어 올해 2층 현대 도시관을, 내년에는 3층 미래 도시관을 층별 테마로 구분해 선보일 예정이다.

개항 이후 근대 도시로 출발한 인천은 어떻게 변화하고 확장해 왔을까. 개항장의 중심은 어디인가. 감리서는 어떤 역할을 했나. 오늘날 인천이 300만 대도시로 도약한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이같은 궁금증을 풀어주는 곳이 이번에 개관한 1층 근대도시관이다. 1883년 개항부터 1945년 광복 때까지 인천의 확장과 변천 과정을 담고있다. 근대 도시로 성장했던 인천의 도시 성격이 시기별로 어떻게 변했는지에 초점을 두고 세분화 했다.

1부 '개항도시'에서는 개항 후 내동에 자리했던 인천감리서를 중심으로 인천을 근대도시로 건설하고자 했던 조선 정부의 의지와 그 과정을 소개한다. 2부 '진센과 인천의 양면'에서는 한일병탄 후 식민통치의 당위성을 인천의 근대화에서 찾으려 했던 일본의 야욕을 전시했고,

3부 '군수공업도시'에서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의 군수기지로 이용됐던 인천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 본보는 이같은 근대도시관의 전시내용을 중심으로 '박물관에서 만나는 근대도시 인천'을 3회에 걸쳐 연재한다.


▲개항도시 제물포(1883~1906)

19세기 중엽, 무력으로 중국과 일본을 개항시킨 서구열강의 시선이 조선으로 향하자, 조선 정부는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이에 조선을 개방시키려는 서구열강과의 충돌이 빈번해졌다. 프랑스와 미국 함대의 무력 침공에도 개방을 허용치 않았던 조선은 강화도를 불법 침략한 일본 군함 운요호(雲揚號)와 충돌을 계기로 1876년 2월 일본과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를 체결하고 부산을 포함한 3개 항구를 개항하기에 이른다.

그 중 도성의 초입에 위치했던 인천의 개항을 두고 조선 정부와 일본은 치열한 신경전을 벌여야 했다.
1883년 1월1일 조선 정부는 인천도호부 서쪽의 작은 포구 제물포를 개항했다. 몇 척의 어선만이 드나들던 제물포 해안은 무역을 위해 입항하는 외국 기선의 정박지가 됐고, 상인과 부두 노동자들이 모여들면서 개항장(開港場)이 됐다. 조선 정부는 출입국 사무와 개항장의 질서유지를 위해 인천항 감리서를 설치하고, 감리서에서 서쪽 해안에 이르는 땅을 각국의 조차지로 설정했다.

각국은 자신들이 조차한 땅, 즉 조계지에 도로와 관공서, 주거지를 구획하고 기반시설을 설치했다. 조계지 동쪽, 감리서가 있던 내동을 중심으로 조선 정부의 관공서와 은행, 위탁판매를 담당했던 객주(客主) 상점이 들어섰다. 포구를 끼고 있던 한적한 어촌마을 제물포는 개항을 기점으로 근대 도시로 변모해갔다.

▲개항장의 중심, 내동

조선시대 인천도호부 다소면 선창리의 작은 어촌마을이었던 제물포는 개항 이후 부두노동자와 상인이 모여들면서 인구가 급증했다. 조계지로 유입되는 외국인도 늘어났지만, 조계 너머로 삶의 터전을 마련한 조선인의 수도 해마다 증가했기 때문이다.

개항 직전 20여 호에 불과하던 조선인 가옥은 1897년 2300호를 넘어섰으며, 인구도 9000명에 달했다. 인구가 늘어나면서 행정구역도 내동, 외동, 정동, 답동, 용동 등으로 세분화됐다. 그중 내동 일대는 감리서를 비롯한 조선 정부의 관청과 은행, 상점이 몰려있는 명실상부한 개항장의 중심이었다.

▲개항장의 관공서

조선 정부는 인천항을 통해 수입되는 물품의 관세를 징수하기 위해 해관을 설치하고, 해관의 관리·감독과 개항장의 질서유지, 외국인의 출입국 사무를 관장하는 감리(監理)를 신설했다. 감리의 역할은 처음에 통상 사무로 국한했으나, 인천부사가 감리를 겸직하면서 인천부의 행정 사무와 개항장의 통상 업무를 총괄했다.

1894년 갑오개혁 후 감리서 담장 안으로 관립인천항외국어학교와 인천부공립소학교 등의 교육기관과 개항장 재판소, 경찰서가 설립됐다. 감리서 주변으로는 화폐를 찍어내던 전환국을 비롯해서 체신업무를 담당했던 우체사와 전보사, 그리고 국영 해운회사였던 이운사(利運社), 국립 대한천일은행이 들어섰다.

▲인천항의 조선인

제물포에 외국 선박이 정박하면서 개항장에는 부두노동자와 무역중개업에 종사하는 상인들, 즉 객주(客主)가 모여들었다. 이들의 상점과 가옥은 대개 조계지와 인접한 내동과 신포동에 몰려 있었고, 점차 답동과 경동, 용동 등 동쪽으로 확대됐다.

객주들은 일본과 청국 상인에 대응하기 위해 조합을 결성했고, 이를 모태로 1897년 신상회사(紳商會社)를 창립했다. 1899년에는 조선인 자본가 정치국(丁致國)의 대한협동기선회사(大韓協同汽船會社)가 해운업과 창고업을 시작하면서 일본 회사와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한편, 조선인 선교를 위해서 답동에 천주교 성당이, 내동에는 감리교회와 성공회 성당이 들어섰고, 각각 박문학교, 영화학교, 성누가병원 등 부설 학교와 병원을 두어 조선인에게 교육과 의료 서비스를 제공했다.

▲그들만의 공간, 조계(租界)

조계는 개항장의 특정 지역에 외국인 전용 거주 공간을 정해 그곳의 행정권을 그들에게 위임하는 것을 말한다. 조계를 관할하는 국가의 수에 따라 전관조계와 공동조계로 구분되는데 인천에는 일본, 청국의 전관조계와 양국을 포함해서 영국, 미국, 독일 등 다섯 나라가 공동으로 관리하던 공동조계가 있었다.

조선인은 각 나라의 조계 안에서 거주할 수 없었고, 어떠한 상업 행위도 할 수 없었다. 그에 비해 외국인은 1883년 조선과 영국 사이에 체결된 조영수호통상조약(朝英修好通商條約)에 따라 조계로부터 10리 이내의 잡거지(雜居地)에서 토지와 가옥을 소유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개항장 중 세 군데의 조계가 설정된 곳은 인천이 유일했는데, 조계마다 여러 나라의 특색있는 건축물이 세워져 바다에서 바라본 제물포의 풍경은 다채롭고 이색적이었다.

▲청국전관조계

1884년 3월, 조선 정부는 청국과 인천구화상지계장정(仁川口華商地界章程)을 체결하고 일본조계 서쪽, 약 5000평의 땅을 청국조계로 설정했다. 청은 이곳에 영사관과 순포청을 둬 자국민의 권리와 상인의 무역행위를 보호했다.

개항 후 인천에 유입됐던 중국인들은 대개 산동지방 출신으로 부두노동에 종사했던 쿨리(苦力)와 무역과 상업에 종사했던 화상(華商), 농사를 짓기 위해 건너온 화농(華農)으로 구분됐다. 그 중 화상들은 '중화상무총회(中華商務總會)'를 조직해 조선 및 일본 상인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했다.

▲일본전관조계

일본은 개항 이전부터 제물포에 공사관 직원을 파견해 조계지를 선점하고자 했다. 1882년 7월 부두에서 가까우면서도 매립이 가능한 해안지대 약 7000평을 자국의 조계로 정하고 측량을 통해 도로와 영사관 부지를 구획했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정부는 1883년 9월, 일본과 조선국인천구조계약조(朝鮮國仁川口租界約條)를 체결하고 인천에서 일본조계 설치를 공식 승인했다.

일본조계에는 우편국, 경찰서 등 관공서와 함께 일본 상인들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은행, 사찰, 학교 등도 들어섰다. 청일전쟁 후 인천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한 일본인들은 조계 너머 조선 땅으로 세력을 넓혀 갔다.

▲각국공동조계

1884년 11월, 조선 정부는 이미 인천에 전관조계를 두고 있던 일본, 청국을 비롯해 영국, 미국과 인천제물포각국조계장정(仁川濟物浦各國租界章程)을 체결하고 일본과 청국조계를 둘러싸는 약 14만평의 부지를 각국공동조계로 설정했다.

1년 뒤 독일이 이 장정에 포함되면서 각국조계는 다섯 나라가 공동으로 관리하게 됐다. 영사관이 행정을 담당했던 일본, 청국조계와 달리 각국조계의 행정은 자치의회에 해당하는 신동공사(紳董公司)에서 맡아보았다.

신동공사는 다섯 나라의 영사와 세 명의 지주, 조선 측 대표로 참여한 인천항 감리 등 모두 9명으로 구성됐다. 세 곳의 조계 중 가장 넓었던 각국조계에는 외국인 공동묘지와 공원 등 각종 근대 시설이 들어섰다.

/글 이동화 기자 itimes21@incheonilbo.com

/사진제공=인천시립박물관 인천도시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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