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청백리의 뿌리를 찾아서] (3)경기 청백리 이야기 ③- '청문고절' 추앙받은 용주 조경
▲ /그림=유사랑 화백
▲ 용주 조경의 초상화
▲ 조경을 제향한 용연서원.
41세 늦은 나이로 벼슬길 … 원칙·소신 갖고 '국가원로 역할'에 충실
당파 떠나 폭넓은 교유관계 … 은퇴 후 '월급 사양' 고향서 검약 생활


청백리 조경은 언관직을 수행하면서는 왕과 권력에 굴하지 않고 직언을 한 강직한 정치인의 표상이었다. 당시 정국의 이슈였던 소현세자빈 강씨의 사사(賜死)를 반대하고, 윤선도의 예론을 지지했다. 84세까지 장수하면서 선조 이후 현종대까지 원칙과 소신에 입각해 국가 원로로서 역할을 충실히 했다. 포천시 신북면 신평리에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는 용연서원이 있으며, 신북면 만세교리에 묻혀있다.


#권력에 굴하지 않는 소신의 정치인

용주(龍洲) 조경(趙絅, 1586~1668)은 인조·효종·현종의 삼조(三朝)를 모신 조정의 원로였다. 역사는 〈조선왕조실록〉에서 그를 '청문고절'이라는 한마디로 평가했다. '청문(淸文)'은 중국의 시인 두보 시에 나오는 구절로 시문이 뛰어난 것을 의미하며 '고절(苦節)'은 곤경을 당해도 변치않는 굳은 절개를 말한다.

그가 살았던 16세기 말~17세기 후반은 조선왕조의 가장 험난한 시기였다. 임진왜란, 인조반정, 이괄의 난, 정묘·병자의 양대 호란과 극심한 자연재해, 그리고 중앙 정국에서 일어난 예송(禮訟)의 소용돌이로 정치적 파장이 전개됐기 때문이다.

그는 광해군 때 북인의 출사 요구를 뿌리치고 거창·함양 등지에서 10여 년 동안 은거생활을 하다가 인조반정 이후 관직에 나왔다. 41세의 늦은 나이로 문과 정시에 장원함으로써 벼슬길에 나섰지만, 이후 엘리트 코스의 길을 밟았다.

그의 강직한 면모는 1636년 6월 사간으로 있으면서 구언전지(求言傳旨)에 응해 올린 봉사(封事)에서 당시 권력의 실세 좌의정 홍서봉(洪瑞鳳)의 뇌물 수수 사건을 강하게 비판한 것에서 나타난다.

"좌의정 홍서봉은 뇌물을 받아온 지 오래됐습니다. 그가 일찍이 병조 판서로 있을 적에 한 무부(武夫)가 곧바로 정청(政廳)으로 들어와 그에게 뇌물을 바치고 벼슬을 산 사람들을 모조리 열거하면서 무서운 얼굴로 꾸짖자, (홍)서봉은 얼굴과 목이 붉어지며 정청에 있던 사람들에게 부끄러워했다고 합니다. …전하께서는 이처럼 전에 없던 천변을 만났으니, 탐묵한 정승을 내쫓으시고 또 성상의 과실을 신칙하시어 하늘에 대응하는 실상으로 삼으십시오."

조경이 홍서봉의 부정과 비리를 비판하자, 인조는 좌의정을 두둔하며 오히려 그의 잘못을 지적했다. 그러나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좌의정 홍서봉의 부정부패 사건을 왕이 그대로 넘어 간다면 이후에 엄청난 부정부패와 뇌물 수수 사건이 있더라도 이를 처벌하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곧은 언론과 인조의 처사를 반대했는데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국왕의 신임이 각별했던 것으로 보인다. 양관 대제학에 이어 이조참판, 대사간, 도승지를 거쳐, 1647년에도 62세 나이에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제수받았다.


#당색을 초월한 교유

그는 폭넓은 교유를 맺었다.

그는 특정 당파에 얽매이지 않고 당시 정계의 서인과 남인계 명사들과 교유했다. 이는 그가 남명 조식의 문인인 문위(文緯, 1555~1632)를 스승으로 모셨고, 김식(金湜, 148~1520)에 연원하는 윤근수(尹根壽, 1537~1616)의 문하를 출입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만년에 들어 당시 남인세력의 공론을 주도해 나가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다른 당파에 속한 인물들과도 공의(公義)에 입각해 소통했던 인물이었다. 모두 시류(時流)와 당파에 매몰되지 않고 국가적 대의와 주관의 신념에 충실하려 했다.

이조판서 때 조경은 엄정하게 인사를 진행했다. 야사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사례가 전한다.

"선생께서 시골로 내려가는 길에 점막(店幕)에 들어가 점심을 먹었다. 젓가락을 들어 반도 채 먹기 전에 같은 집에 있던 한 무관(武官)이 측간에 갔는데, 거기에 마침 선생이 앉아 있는 자리와 방문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 무관이 맨몸을 드러낸 채 앉아서 볼일을 보면서 음식이 중하고 대변이 더럽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처럼 태연스러운 기색을 한 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에 대해 물어보니, 바로 북관(北關)의 무관 수령으로서, 선생이 주의(注擬)한 자였다. 선생이 그를 불러 힐책하기를, "네가 인정에 대해 이와 같이 모르는데 백성들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이번 정사에서 천거한 것은 네가 한 벼슬자리에 오래 있어서였다. 내가 잘못 천거했으니, 너는 부임하지 말라."

그러자 그 무관이 석고대죄했다. 선생이 포천에 도착했는데, 그 무관이 뒤따라와 애원했다. 선생은 무관이 직임을 수행한 것과 어버이를 위하는 정이 남다른 것을 보고 곡진하게 가르치고 깨우쳐서 보냈다. 그 무관이 고을에 도착한 뒤 쌓은 공로가 온 도내에서 최고였다. 그 뒤에 돌아오는 길에 선생을 찾아와 뵈었다. 선생이 그와 말을 나누어 보니, 기질(氣質)이 변화돼 완전히 딴사람이었다. 선생이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묘함이 이와 같았다.


#청백리에 선발되다

조경은 백마산성에서 해배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1653년 8월 회양부사로 부임해 백성들의 애환을 보고 들을 수 있었다. 이후 그는 1654년 회양부사를 마지막으로 관직을 떠났다. 그의 나이 69세였다. 고향인 포천에서 만년을 보내면서 검약한 생활을 했다. 조정에서는 월급을 지급하려고 했으나 10여 차례나 상소를 올려 극구 사양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자신의 월급으로 유랑하는 수 십 명의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만년에 예론 상소 문제로 유배된 윤선도를 구원하려다가 서인세력으로부터 심한 공격을 받았다. 이 사건은 그가 남인세력의 대표 정객으로 인식된 계기였다.

84세 나이로 생을 마감하자 현종은 이틀 동안 조회를 보지 않고 넉넉하게 장례를 치르도록 했다.

그는 사후 1695년에 청백리로 선발됐다. 당시 대신 남구만(南九萬)과 유상운(柳尙運)이 왕명을 받아 초계(抄啓)할 적에 외손인 이후정(李后定)이 함께 뽑혔다. 두 사람이 한꺼번에 선발에 뽑힌 것 역시 드문 일이었다.

/글 조준호 실학박물관 학예기획부장·사진제공=포천시



[암행어사 두번 수행...만년에 대동법 지지]

조경은 출사와 은퇴를 반복해 벼슬살이보다는 초야에 묻혀 백성들과 함께 부대끼고 어울린 시간이 많았다. 그는 두 차례나 암행어사로 발탁돼 목민관의 실정과 민정의 동태를 정밀하게 살폈다.

특히 1635년(인조 13) 호남지역 암행감찰 임무를 수행한 것에 대해 인조는 경연석 자리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이번 암행어사들 가운데 오직 조경 혼자만이 민간에 출입하면서 수령들이 잘 다스리는가의 여부와 민생의 어려움을 자세히 파악했다"며 공로를 치하했다. 그는 이때 관료사회에 만연한 목민관의 부정부패와 탐관오리의 등쌀에 시달리던 백성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목격했으리라 짐작된다.

또 그는 몇차례 목민관에 임명돼 선정을 베풀었다. 경상도 지례현감으로 임명돼 부임하는 도중에 피폐한 백성의 생활을 보고 '열원리에서 묵다'라는 시를 지었다.

'쑥대를 엮어 벽 쌓고 짚으로 문을 만들었는데/생계가 막막한 것은 온 마을이 한결 같다네./관리들 다그치는 소리에 닭과 개들 시끄럽게 짖어대고/고부가 저녁부터 밤 깊도록 방아 찧느라 분주하네./겨죽으로 한 해를 마칠 것을 걱정하는 모습 가련한데/누가 백성들의 어려움을 그려 대궐에 호소하여 주리./홀로 석호리 시구하나 마음속으로 읊조리니/옛날과 지금이 다르다만 함께 논할만하네.'

만년에 그는 조선시대 최고의 개혁인 대동법의 필요성을 지지했다. 그는 "김육이 추진하는 대동법은 보국안민(保國安民)을 위해 시급히 추진해야할 제도인데도 지금의 군자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법 시행의 지연을 한탄했다. 그는 김육의 신도비명을 지으면서 '잠곡 김육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대동법의 시행을 생각하며 서필원(徐必遠) 등에게 뒷일을 부탁하는 우국과 안민의 학자요 관료'라고 표현했다. 이처럼 그는 경세가(經世家)를 존중했고 그 행적을 사실적이고 실증적인 문장으로 표현한 학자였다.

/조준호 실학박물관 학예기획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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